수로왕과 인도 공주의 시공을 초월한 로맨스 보는 듯

▲ 김수로왕릉.
▲ 구지봉 고인돌.
낙동강 유역 변진 지역에 기원을 전후로 하는 시기에 가야의 여러 나라가 있었다. 그중 AD 42년에 김해 지역에서 건국된 나라가 가락국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의하면 가락국을 세운 사람은 김수로왕이었으며, 그 왕비는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후라고 한다. 가락국은 6가야의 맹주로서 주변의 다른 가야들 중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6세기경 신라의 세력팽창에 의해서 김해지방에 있는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는데 이 금관가야의 전신이 가락국인 것으로 보인다.(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지리적 환경을 보면 가야 계통 소국들이 점유하고 있었던 지역이 늘 일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랫동안 보유하며 중심 근거지로 삼았던 곳은 낙동강 중·하류의 서쪽 지역 일대로서, 낙동강의 서쪽 지류인 황강과 남강 유역 및 경상남도 해안 일대의 땅이었다. 이러한 형세(形勢)는 소백산맥 서부의 덕유산과 지리산으로 둘러싸인 영남 지역 전체에서 서남쪽 절반을 차지한 형세이다. 그러나 가야 전기에는 이보다 조금 넓은 영역을 차지하여, 낙동강 동쪽의 가지산과 비슬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가야 후기의 전성기에는 소백산맥을 서쪽으로 넘어 호남정맥(湖南正脈)을 경계로 삼아 금강 상류 지역과 노령산맥 이남의 섬진강 유역 및 광양만, 순천만 일대의 호남 동부 지역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가야 지역은 기후가 온난하고 땅이 비옥하여 낙동강변 및 남해안을 따라 골고루 분지 모양의 평야가 발달했으며, 곳곳에 나지막한 지맥(地脈)이 뻗어 있어 부분 부분의 평원은 있으나 광활한 평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지리적인 조건에 따라 둘로 나눈다면, 낙동강 하류 지역을 비롯한 경상남도 해안 지대와 낙동강, 남강, 황강 상류 지역을 비롯한 경상 내륙 산간 지대로 나눌 수 있다. 가야 지역은 질 좋은 철광산이 산재하고 양호한 수상 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낙동강 가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되었으며, 하류 지역의 김해·부산·양산 일대는 어로와 해운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고, 합천·고령·성주 등의 중류 지역 일대는 안정적이고 양호한 농업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에 낙동강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남도 서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으되, 제한적이나마 창원·고성·사천 등의 해안 지대는 해운을 유지할 수 있었고, 산청·함양·거창 등의 산간 지역은 농경 조건이 좋은 편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김수로왕릉은 일명 '수릉(首陵)'이라고도 하며,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이다.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직도 나라가 없던 시절에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3월 어느날 하늘의 명을 받아 9간(九干:族長) 이하 수백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들이 하늘에 제사지내고, 거북아 거북아/머리를 내어라/내놓지 않으면/구워서 먹으리/하고 춤추고 노래하자 하늘로부터 붉은 보자기에 싸여진 금빛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태양처럼 둥근 황금색의 알이 여섯개 있었다. 바로 이곳이 신화의 장소이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남아가 차례로 태어났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라 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모셨고, 다른 남아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천신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國)의 왕녀인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수로왕과 수로왕비는 하늘이 중매를 섰다. 아유타국(인도)의 공주였던 허황옥의 부모가 꿈을 꿨는데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녀는 부모님 말씀대로 16세에 배를 타고 가야국에 당도했고, 수로왕은 그녀에게 청혼해 부부가 됐다. 그들은 각각 157세, 158세까지 장수했으니 그야말로 부부의 '백년' 가약을 지키고 간 셈이다. 지금에 생각하면 최초의 국제결혼이 성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적이어서 그대로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신화는 그 구조상으로 볼 때, 신성한 왕권의 내력을 풀이한 천강난생신화(天降卵生神話)로서 한국고대국가 성립기에 흔히 보이는 건국시조신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자료인용.http://www.koreandb.net)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구지봉은 주변에 아파트도 있고, 시장도 있으며 현대인의 생활권역이다. 서양의 많은 고대왕국이 땅 속에 묻혀서 발굴가와 탐험가를 부르고 있는 반면 구지봉은 일반생활권역인 동네의 야산에 있으니 의미 있는 사실이다. 마을이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사람이 살아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더 대단한 건 구지봉에 있는 고인돌이다. 이는 기원전 4~5세기경 청동기시대 무덤이다. 가락국 수로왕의 재위 년도가 기원후 42년, 철기시대이니 이 무덤은 그 조상의 것이겠다. 이미 수로왕 탄생으로부터 수백 년 전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이 모든 기적과 난리를 지켜봤을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로 그 시대 마을 추장의 무덤쯤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에도 그 가치를 알았는지 고인돌에 새겨진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는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쓴 것이라고 전한다.

풍수지리적 맥락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김해는 영남권에서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낙동정맥의 끝지락에 위치한다고 생각되겠지만, 산맥과 물 가름으로 분석해 보면 그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낙동정맥은 낙동강을 우축으로 하여 태백산을 기점으로 남으로 뻗어 부산 몰운대(沒雲臺)에서 끝을 맺고 있으며 낙동강은 그 물길이 700리라 하여 태백에서 을숙도에 이르는 물길로이다. 김해로 이어지는 맥은 낙동정맥에서 뻗어난 지맥이 아니라 백두대간의 종산으로 여기는 지리산을 태조산으로 하여 뻗어 나온 낙남정맥이 본맥이 된다. 낙남정맥 북으로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남강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삼량진에서 낙동강에 합류하고 있다.

따라서 김해는 낙남정맥을 주맥으로 하여 무릉산(313m)과 금음산(376.3m)을 거쳐 동으로 이어오다가 경운산(377.2m)을 성봉하여 김해지역의 백호가 되고 북으로 뻗어 숨을 고르듯 낮게 이어져 야훼동산(280.6m)을 만들었으며 여기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크게 낙맥하여 재(너미)를 만들었다. 산맥은 크게 일어나면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하나의 독립된 산맥으로 이어지는데 김해의 주산이 되는 분성산(326.8m)을 성봉 하였다. 김해천문대가 있는 곳에서 여러 지맥으로 갈라지고 그 중 서남쪽으로 어어지는 맥은 수로왕비릉이 있는 구지봉(龜旨峰)맥으로 낮게 형성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완만한 구릉지 형태의 맥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러한 맥을 풍수지리학적으로 평강세(平强勢)라 한다. 구지봉에서 지봉(止峯)을 하고 남으로 방향을 틀어 낮고 넓게 평평한 지세로 바뀌어 김수로왕릉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지세는 평지에 가까운 것으로 평지세(平地勢)하여 가장 안정감을 주는 지세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지세는 경주에 있는 신라의 릉 또한 그러한 곳이다. 김해의 청룡맥은 신어산(630.7m)와 돗대산(381m)로 형성된 산이 되며 백호는 경운산(377.2m)에서 이어져 크고 낮게 낙맥하여 방향을 동으로 틀어 형성된 함박산(165m)과 임호산(179.6m)되며 이 두 산은 김해의 조안산(朝案山) 역할을 하고 있다. 김수로왕릉으로 낮게 이어져 온 맥이 마지막으로 성봉한 곳은 봉황대공원이 있는 곳에서 끝을 맺는다. 이 봉우리가 김수로왕릉의 안산(案山)이 된다.

김해지방은 김수로왕릉을 중심으로 역사적 자료가 많은 곳으로 역사관광을 하기에 좋은 곳이며, 김수로왕과 왕비릉, 파사석탑과 구지봉 그리고 구야국(狗耶國) 수로왕(首露王: 재위 42∼199) 때 인도에서 온 승려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창건하였다고 알려진 은하사[銀河寺]를 함께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