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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방이 넘칠 때

따스한 '밥 한 그릇' 위해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 그들의 이동은 원초적 본능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등록일 2015년09월10일 22시34분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예전의 '먹방'(먹는 방송)이 요즘에는 '쿡방'으로 진화하였다. 쿡방이란 '쿡(Cook·요리하다)'과 '방송'을 합성한 말이다.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다. 직접 요리를 해보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방송이다. 따분한 정치 이야기보다도 먹고 사는 즐거움에 푹 빠져가는 세상이 되어간다. 어딘지 모자라는 것 같기도 하나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결국 고상한 척 해봤자 삶은 이념보다도 먹고 사는 현실로 향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라가 나라다운 것은 식색(食色) 즉 음식남녀(飮食男女)를 해결해 주는 일이다. 먹고 마시는 일, 사랑하는 일. 이 문제를 어찌 소홀히 하랴. '옷 입고 밥 먹는 것'(穿衣吃飯)이 바로 그대로 '윤리'이다. 이렇게 콕 찔러 말한 사람이 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어그러지면 '나라가 있어도 나라가 아닌(其國非其國)' 것이다. 이미 끝장 난 것이다.

사람들은 먹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곳으로 목숨을 걸고 떠난다. 밥 먹을 수 있는 곳에는 자꾸 사람들이 모인다. 어느 지역 어느 국가든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면 일단 의심해야 한다. 그곳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고, 불안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만사를 안다'(萬事知)고 하지만 결국 따스한 '밥 한 그릇'(食一碗) 챙기는 데서 출발한다. 밥은 삶의 안전 조건을 상징한다. 아프리카와 중동을 떠나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 그들의 이동은 원초적 본능이다. 새들이 철 따라 본능대로 먼먼 곳으로 이동하듯, 난민들도 살기 위해서 필사의 행진을 계속하리라.

난민의 무덤이 된 지중해의 물은 더 이상 푸르게 보이지 않고, 그 많은 난민들을 받아 들여야 할 유럽도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볼 수만은 없다. 뉴스 속에서 보이는 그런 서글픈 장면들이 언젠가 바로 우리 삶의 현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통일 운운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준비가 얼마만큼 필요한 지 사전 학습하도록 한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모두 현금으로 굴러간다. 외상이 아니다. 아울러 녹화도 불가하다. 늘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먹는다' 마는 기약 없는 이 숟가락질. 더 이상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을 때, 밥이 모자랄 때, 이 몸짓들은 무엇으로 버틸까.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

삼천리 방방곡곡 쿡방이 넘쳐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방송에서만 그치지 말고, 아래로, 길바닥으로 듬뿍 옮겨졌으면 한다. 이 세상 힘들고 가난한 곳에 늘 쿡방 같은 삼시세끼가 주어지면 더 좋겠다. '열무 삼십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와 같은 외톨이 된 영혼들도, 늘 누군가와 함께 따신 밥을 먹을 수 있었으면 한다.

식색의 차원에서 본다면 쿡방은 '식방(食放)'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의 유행은 '색방(色放)'일까? 궁금해진다. 잘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천년이 지나도 음식남녀를 벗어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 나라가 나라다운 것은 이러한 '평범'과 '보통'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렇다. 평범이 비범보다 위대하고, 보통이 특별보다 숭고하다. 밥 한 끼 제대로 먹고, 남녀 간에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이런 기본조건은 우리 삶의 평형수이다. 그 균형 위에 삶이 아슬아슬 불안스레 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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