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초점 - 조난어민위령비 왜 바닷속에 있었나?

독도조난어민위령비(獨島遭難漁民慰靈碑)는 지난 1950년 6월 8일 당시 조재천 경북지사가 1948년 6월 8일 어민 59명이 18척의 어선에 나눠 타고 독도 인근에서 조업을 하던 중 미군 연습기의 오인 폭격으로 14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는 사고 이후 이들의 유혼을 달래기 위해 세웠는데 이 비는 독도에 세워진 최초의 비다.

당시 제막식에서 조 지사는 "경도풍랑(鯨濤風浪)에도 불굴하는 조국 재건의 해양 용사들에게 이 무슨 횡액이냐. 일즉 미군의 진사와 사회적 동정이 답지해 수중 원혼과 유가족의 위무구호에 성의를 바친 바 있으나 사건 발생 2주년을 기념해 단갈(短碣·작은 비석)을 이룩하고 조난 어민의 명복을 비노라"는 조문을 낭독했다.

또한, 당시 위령비 비문에는 '이 비(碑)의 건립 의도는 위령(慰靈) 이 외에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함에 대해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재천명하는 데 있다'고 쓰여 있는 것으로 알려져 당시 경북도가 독도에 대한 실효적지배를 공고히 하는데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독도조난어민위령비의 건립과 사라진 이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독도조난어민위령비 건립일에 대해서는 2003년 발간된 교육인적자원부의 초중고교 독도 학습지도서 등 상당수 독도 관련 문헌들이 1951년 6월로 잘못 소개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2005년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며느리인 조혜자(曺惠子)씨가 이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40여년간 보관해온 사진첩을 공개하면서 1950년 6월 8일 이 비의 건립일로 정확하게 알려졌다.

그러나 비가 없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제기됐다.

디지털 울릉문화 대전 등에는 "1950년에 건립된 비석은 현재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일부 기록은 1953년 6월 일본인들이 무단으로 독도에 상륙해 한국인을 쫓아내고 영토 표지와 함께 위령비를 파괴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태풍 등 자연 재해로 비석이 파손됐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고 나와 있다.

또한, 다른 문헌 등에는 "일설에 의하면 6·25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일본인이 독도에 대해 침탈 행위가 잦았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1952년 8월에 불법으로 독도에 상륙해,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고 쓴 표목을 독도에 세우는 등 계속해서 불법 행위를 저질렀고, 이를 발견한 당시 독도의용수비대에서 그 표목을 제거했다고 한다. 그 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독도조난어민위령비가 파괴됐다고도 하고, 다른 이야기는 태풍에 휩쓸려 사라졌다고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1952년 6월 25일 일본 수산시험선 1척 독도상륙, 일본인 9명 독도입도해 독도조난어민위령비 파괴하였다"고 나와 있으며 울릉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1959년 울릉도에 최악의 피해를 발생시킨 태풍 사라호때 유실 됐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역사적인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언제, 어떻게, 어떤 이유로 바다 속에 침잠됐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을 60여년만에 달랠 수 있게 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우리 땅 독도에서 일어난 우리 국민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비석의 발견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더욱 큰 역사적 사실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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