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 애도하는 것 같으나 실은 산 자들의 건강한 축제 형식보다 마음가짐이 중요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랭보의 시구는 아리다. "상처입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안 됐으나 가을은 상처에서 먼저 오는 것 같다. 더 버티기 힘든 것, 약한 것, 아픈 것들이 다른 것보다 먼저 물들고, 먼저 붉어진다. 그래서 결국 앞서서 뚝 하고 하직한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떠나는 행렬을 본다. 앵앵대는 예초기 소리에 알아차린다. '아, 또 가을이구나" 봉분과 그 주변으로 자라난 풀을 깎으며 조상을 생각하는 것. 그것은 내가 바로 '부모가 남긴 몸(父母之遺體)'임을 확인하는 일이리라.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을 지금 내 눈 앞에 다시 호출해 내는 일은 그 이유가 간단하다. 내가 여기 살아있음을 되짚어보는 것, 수풀에 묻혀 은폐, 매몰되어가는 자신의 의미를 들춰내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내 삶의 의미가 지닌 잔가지와 이파리, 뿌리와 줄기를 선명히 더듬어보는 것이다.

언제까지 벌초가 지속될 것인가. 언제까지 내 삶의 계보를 노크해 볼 것인가. 잘 모르겠다. 끊어진 길을 더듬어 해마다 산과 들을 찾아 벌초하는 노력이 있는 한 매장의 풍습이 존속하리란 것도.

매장 나아가서 납골당처럼 유골을 보존하고 삶의 서열을 기리는 형식은 '얼=백(魄)'을 숭앙하는 것이다. 얼 기리기에 중점을 두면 무덤을 쓰고 찾는 형식이 중시된다.

그러나 화장하여 뼈를 산천에 뿌려버리는 경우는 다르다. 얼이라는 유형보다도 '넋=혼(魂)'이라는 무형을 기리게 되리라. 물론 매장을 해도 넋을 기리는 쪽에 중점을 두면 신위를 모신 상징적 형식'=묘각 또는 제사 상차리기'이 중시되리라. 앞으로 우리의 조상 모시기는 '넋=혼' 쪽, 아니면 '얼=백' 쪽으로 향할 것인가. 매장-무덤, 아니면 신위 라는 상징이 중시될 것인가. 형식인가 정신인가. 고민스럽다.

삼천리 방방곡곡 예초기 쨍쨍댈 때 나는 초혼재생(招魂再生)의 진정성을 다시 묻는다.

전통적 사고에서 보면 사람은 죽어 '혼비백산(魂飛魄散)'한다. 정신적인 요소인 넋=혼은 가벼운 것이라 "새처럼 훨훨 날아서" 하늘로 가 떠돈다. 물질적인 요소인 얼=백은 "백골이 진토되어" 아래로 흩어져 땅에 묻힌다. 살아있다는 것은 혼과 백이 균형 있게 결합해 있다는 말. 죽음은 그 분열이다. '넋 나가고, 얼빠진' 것이다.

벌초도, 제사도 얼과 넋을 호출하여 다시 기리는 일이다. 무(無)에서 출발한 육신이 이 세상에서 삶을 누리다가 다시 무로 돌아가는 일은 자연이고 섭리이다. 그러니 어느 것은 좋고 어느 것은 나쁘다고 할 것이 없다.

제사는 형식보다도 마음가짐이 우선이다. 산해진미를 다 차려 놓아도 정성이 없으면 도로묵이다. 죽은 자들이 산 자를 불러 모으는 제삿날은 사실 산 자들이 죽은 자를 핑계로 서로 모여 자신들의 의미를 짚어보는 날이다. 이 땅에 이렇게 살아있음을 자랑하고 서로 축하하는 일이다. 그런 산 자들의 시간을 만들어 가는 마당이다. 죽은 자들을 기리는 제사의 형식은 생일을 챙기는 일과 동일하다.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 같으나 실은 산 자들의 세상을 만드는 건강한 축제 아닌가. 비극을 읽는 이유가 그렇듯, 제사도 죽은 자들을 애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비극적 삶을 자신들의 희극으로 바꾸려는 간절한 기도 형식이다. 그들의 슬픈 날들이 모두 나의 기쁜 날이기를 염원하는 자리이다. 철들어 가며 이런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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