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백호 교쇄…북서풍 막고 좋은 기운 모아둔 '명당 중의 명당'

▲ 극락전
▲ 극락전 닫집.
▲ 대웅전.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부석사에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렀으므로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 지조암, 중암이 있다. 특히, 고려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가기도 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이절의 설화를 살펴보면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있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 부르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불문에 들어와 대망산 바위굴에서 계절이 지나는 것도 잊고 하루에 한끼 생식을 하며 도를 닦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 한 추위가 휘몰아치는 겨울에도 찌는 듯 한 더위의 여름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염(念)하며, 마음과 몸을 나른하게 풀어지게 하고 괴괴한 산속의 무서움과 고독 같은 것은 아랑 곳 없었다. 이렇게 십년을 줄곧 도를 닦기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밤 홀연히 아리따운 한 여인이 앞에 나타나 "여보세요. 낭군님" 옥을 굴리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미처 능인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보드라운 손길이 능인의 손을 살며시 잡지 않는가! 눈을 들어 보니 과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고운 살결에 반듯하나 이마와 까만 눈동자 오똑한 콧날, 거기에는 지혜와 정열이 샘솟는 것 같아 진정 젊은 능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 했다. 여인은 "낭군님" 다시 한 번 맑은 목소리로 능인을 불렀다. "소녀는 낭군님의 지고하신 덕을 사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낭군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사옵니다. 부디 낭군님을 모시게 하여 주옵소서." 여인의 음성은 간절하여 가슴을 흔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능인은 십년을 애써 쌓아온 수련을 한 여인의 간청으로 허물 수 없었다. 능인은 준엄하게 여인을 꾸짖었다. "나는 안일을 원하지 아니하며 오직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의 공적을 사모할 뿐 세속의 어떤 기쁨도 바라지 않는다. 썩 물러나 네 집으로 가거라!" 능인의 꾸중에 산도 크게 울리는 듯 했다. 그러나 여인은 계속 유혹을 하며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능인은 끝내 거절하였으며 오히려 여인에게 깨달음을 주어 돌아가게 했다. 여인이 돌아서자 구름이 몰려드는가 싶더니 여인이 사뿐이 하늘로 오르며 " 대사는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나는 천상 옥황상제의 명으로 당신의 뜻을 시험코자 하였습니다. 이제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사오니 부디 훌륭한 인재가 되기를 비옵니다." 여인이 하늘로 사라지자 그곳에는 산뜻한 기운이 내려와 굴 주변을 환히 비추었다. 그때 하늘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또 울려왔다. "대사, 아직도 수도를 많이 해야 할 텐데 굴이 너무 어둡습니다. 옥황상제께서 하늘의 등불을 보내드리오니 부디 그 불빛으로 더욱 깊은 도를 닦으시기 바라나이다." 그러자 바로 그 바위 위에 커다란 등이 달려 어둠을 쫓고 대낮같이 굴 안을 밝혀주고 있었다. 능인은 그 환한 빛의 도움을 받아 더욱 열심히 수련을 하여 드디어 득도하여 위대한 스님이 되었다.

안동 지리지인 <영가지>에 따르면 봉정사(鳳停寺)는 '부(府) 서쪽 30리에 있는 천등산 아래에 있다. 신라시대에 이름난 절이 되었다. 1566년 봄에 퇴계 선생께서 절의 동쪽 낙수대 건물에 붙인 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在府西三十里天燈山下羅代爲名刹前有落水---].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6교구 본사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인 봉정사는 참선도량 (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는 부속 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봉정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지닌 곳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봉정사의 역사에 대하여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창건에 관한 사실도 전설에 상당한 부분을 의존하고 있고 그 이후의 역사적 사실도 몇 차례 중수한 것을 제외하면 알 수 있는 사실은 전무한 편이다. 얼마 전까지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극락전의 옥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1972년에 실시된 극락전의 완전한 해체 복원 시에 상량문에서 발견되어 지금까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봉정사 극락전(국보15호)이 인정받게 되었고 극락전의 건립 연대는 적어도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과정에서 사찰 창건 연대를 확인해주는 상량문과 대웅전 내 목조 불단에서 고려 말에 제작했다는 묵서가 발견돼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이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바뀔 것으로 확실시되고 있다. 대웅전 지붕의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북서쪽 종보 보아지에서 발견된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중국연호인 선덕 10년 <1435년, 조선조 세종 17년>에 쓴 글) 라고 적힌 상량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가 직접 썼고 자사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이라는 사찰 건축연대를 밝혀주는 내용과 당시 봉정사의 사찰 규모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있어 대웅전 창건 연대가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지정 21년 <1361년,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하여 시주하다. 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처음 확인, 대웅전 불단이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새로 발견된 상량문에는 2층 누각 신축, 단청을 한 시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 사찰규모 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 초 당시 봉정사는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결(1만여평)의 논밭에다 안거스님 100여명에 75칸의 대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http://www.bongjeongsa.org)

주차장에서 조금 경사진 길을 따라 오르면 우거진 나무숲이 아늑한 봉정사가 나온다. 한 길 높이로 치솟은 참나무 숲이 참으로 싱그러운 기운을 자아낸다. 새로 세운 일주문을 넘어서면 해묵은 참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우거져 있다. 그곳을 지나면서 가파른 계단 위쪽으로 그리 크지 않으면서도 위엄을 갖춘 덕휘루(德輝樓) 건물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변이 아늑하면서도 앞이 트인 자리에 앉은 봉정사는 환한 햇빛을 온몸에 가득 받고 있다. 이처럼 누각 아래로 들어가도록 입구가 만들어져 있는 방식은 경사진 지형에 지어진 집이나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건물의 아래로 들어가려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면서 자세도 숙연해지게 마련이니,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건물은 우리를 겸손한 자세로 만들어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이 덕휘루는 1층은 문이지만 2층은 누마루이다. 현재는 법고와 목어가 걸려 있고 봉정사의 역사가 적힌 편액들도 있다. 덕휘루 밑을 들어서자마자 대웅전 영역이며, 그 서쪽 공간이 극락전 영역이니 봉정사의 큰 두 축을 이룬다.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봉정사를 살펴보면 백두대간의 중점인 태백산에서 서남쪽으로 내어 달린 용맥은 문수산에 이르러 크게 성봉을 하여 잠시 쉬는 듯 하고 남쪽으로 다시 향을 틀어 용맥은 낮고 넓게 이어진다. 만리산과 용두산을 이어 달린 용맥은 좌측으로는 청량산 도립공원이 있는 문명산을 청룡맥으로 하여 보호룡으로 삼고 있으며 우측으로는 멀리 백두대간의 소백산과 월악산 문경새재와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대간룡이 뻗어있다. 봉정사로 이어지는 중심용맥은 안동지역의 주산이 되는 학가산으로 이어지는 맥에 있으며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뒷산에서 크게 나뉘어져 분맥하여 큰 줄기는 학가산(882m)으로 내어주고 굳고 힘찬 용맥은 변화를 거듭하여 봉정사의 주산이 되는 천등산(575.9m)에 이르러 크게 가지맥을 벌리면서 청룡과 백호를 만들고 중심맥은 봉정사로 내려온다. 이러한 산세의 조건을 갖추면서 형세를 하고 있는 것을 풍수적 용어로 개장천심(開帳穿心)이라 한다.

대개의 사찰은 명당의 크기가 크고 사방이 막혀있어 전체적인 모습을 한꺼번에 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므로 사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여기서 사찰을 조망하면 그 터의 특징을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흔히 이런 장소를 풍수에서는 관산점(觀山點)이라고 하는데 봉정사의 관산점으로 추천할만한 곳은 두 군데이다. 하나는 대웅전 바로 뒷편 내룡(來龍: 穴處로 들어오는 산줄기의 흐름)에서 가람과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산줄기들을 바라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한 곳는 우화루 앞 봉정사의 내청룡(內靑龍)에서 느티나무 사이로 봉정사의 전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봉정사의 내룡은 넓적하게 내려온다. 그래서 봉정사 뒷편에서 능선은 기운을 옆으로 펼쳐 자리를 넓게 잡을 수 있게 했고 비교적 옆으로 펼쳐지게 가람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봉정사의 보국은 그리 크지 않아서 주로 옆으로 길게 명당판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건물들이 옆으로 늘어서 있다. 우선 가장 핵심이 되는 주 공간에 대웅전과 극락전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두 건물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어 봉정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들이다.

봉정사 좌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명당 앞에서 합쳐지는데(合水) 이렇게 물이 만나는 것을 풍수학에서 합수처(合水處)라 하고 모인 물이 빠져나가는 곳이 수구(水口: 물길이 빠져 나가는 곳)가 된다. 수구가 명당 가까이에 있는 것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명당 가까운 곳에서 서로 교차하면서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구가 잘 짜여진 안쪽에 훌륭한 명당이 형성되며, 좋은 기운이 잘 갈무리되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훌륭한 조건을 갖춘 터가 된다. 양쪽의 산줄기가 서로 엇갈리게 막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풍수 고전 중 <인자수지(人子須知)>에는 "뭇 물이 모이는 곳이 곧 명당이니 좌우가 엇갈려야 땅 기운을 제대로 갈무리할 수 있으므로 진실로 귀하게 된다."고 하여 매우 귀한 명당으로 본다. 이런 곳은 풍수지리학에서 이상적인 터로 꼽아 '바람을 갈무리하는(藏風)' 터이며, 산이 명당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는(環抱)' 곳이 된다. 따라서 그 명당은 편안하고 안온함을 주게 된다.

봉정사가 안온한 느낌을 받을 수 있고 교쇄가 잘된 명당의 조건을 갖출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외백호(外白虎)가 안산(案山)을 이루어 가까운 곳에서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삭풍을 막아주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봉정사는 내백호가 약한 편이나 이 허약한 내백호를 보완해주면서 기운을 잘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산줄기가 바로 힘있고 당당한 외백호 때문이다. 게다가 이 외백호는 봉정사의 오른쪽을 감싸면서 진행하다가 봉정사 앞에 우뚝 솟아 안산이 되고 명당의 기운을 잘 갈무리해주고 있다. 백호맥은 봉정사의 중심맥의 기운을 갈무리하듯 크게 감고 있으며 백호내맥 아래에는 참선과 수행하기에 좋은 지리적 환경이 만들어진 지조암이 있으며 청룡맥은 장엄하고 봉정사를 지키는 수호신과도 같아서 강건하여 굵고 길게 뻗어 있다. 청룡내맥 아래 역시 기도하기 좋은 공간인 영산암이 있는데 이곳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년)이란 영화 촬영지로 더욱 이름이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봉정사는 풍수지리적 환경으로 볼 때 좌우 산맥이 가깝게 감싸고 있으며 청룡과 백호가 서로 교쇄가 잘 되어 있어서 북서풍을 막아주고 좋은 기운을 모아두고 있어서 명당 중에 명당으로 한국 사찰을 대표하는 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