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위한 가을걷이는 자신만의 새로운 설계이니 즐거움에서 이루어져야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내 인생의 반은 그대에게 있어요. 그 나머지도 나의 것은 아니죠…." 민해경이 부른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를 부르며 시골의 가을 들판을 걷는다.

그렇다. 내 인생의 반은 이미 땅에 묻었다. 대지에 흩뿌렸다. 그 나머지는 허공속의 장난, 잡사에 바쳤다. 서정주 시인이 '아비는 8할이 바람'이었다고 하듯, 조선 땅의 수컷들은 가을이 더 슬프다. 수확물을 인간에 바치는 대지처럼, 등골을 빼 가족에게 다 바쳐왔다. "타관 땅 밟아서 돈지 십년 넘어 반평생…"처럼 지상의 모든 길손들은 이쯤에서 한풀 꺾인다. 무릎에 바람이 술술 새고, 다리는 삐거덕거린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또 꺾이고, 더 꺾인다. 그래도 당당하게 웃으며 가을따라 깊어져 겨울로 가야만 한다.

모든 것에는 제철이 있다. 그 대목에서 찬란히 빛나야 한다. 황금빛 일렁이는 논둑에서 맞는 노을은 장관이다. 침묵하는 구름 속으로 서서히 이끌려 들어가는 찬란한 햇살, 거기에 발을 담근 풍경들. "높고 높은 하늘 천(天), 깊고 깊은 따 지(地), 홰홰친친 가물 현(玄), 불타것다 누루 황(黃)" 방자의 구성진 '천자문 풀이'가 들리는 듯하다. 추수를 기다리는 벼들은 마침내 다음 파종할 것만 남긴 채 거의 인간의 욕망을 위해 바쳐진다. 가을은 잔혹하다. 수확물은 대부분 인간이 뺐어간다. 그 나머지는 다른 생명과 대지가 나눠 갖는다.

따지고 보면 내 인생의 농사도 반타작(半打作)이거나 그 이하이다. 절반도 못 챙긴다. "…슬프다, 내 어디에서/겨울이 오면, 꽃들과 어디서/햇볕과/대지의 그늘을 찾을까?//성벽은 말없이/차갑게 서 있고, 바람 곁에/풍향기는 덜걱 거리네" 이렇게 뜬금없이 휄덜린의 시 '반평생'이 생각나는 것은 삶의 종언을 예감하는 불안에서가 아닐까. 가만히 보면 일렁이는 벼 이삭 하나하나가 덜거덕거리는 풍향계 같다. 황금의 손짓 그 너머로 걸어 들어가는 나의 망상의 막다른 골목은 틀림없이 긴 어둠 속이리라.

반평생은 인생의 멋진 고개 마루 표지판이다. 하산의 기법을 꼼꼼히 챙기고, 정리와 분배의 지혜를 익혀야 할 때이다. 달려오느라 못 보던 풍경도 보고, 조금씩 뒤쳐지면서 가끔 뒤도 돌아 보아야 한다. 어둠에 파묻히기 전 되돌아갈 길을 기억하고, 더 디딜 수 있는 땅을 생각하면서 여력의 총량을 따져 보아야 한다. 연료가 얼마나 남았는지, 계기판을 수시로 쳐다보며 십년, 이십년 넘은 반평생을 정기검사 해야 한다. 자신을 위한 가을걷이는 오롯이 자신만의 새로운 설계이니 서글픔이 아닌 즐거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을 아끼고 돌보며, 가끔은 쏟아져 내리는 낙엽 밑에서 나를 한껏 펴서 휘날려도 보자.

그나저나 가을도 간다. 날숨(呼)과 들숨(吸), 반 발자국을 떼는 사이에 목숨이 달랑 붙어 있다. 찰나생찰나멸이나 푸른 것은 푸르고 또 곧은 것은 곧다. 수운 최제우가 고난의 길에서 한 수 얻었듯이 말이다. "방방곡곡 돌아보니(方方谷谷行行盡) 물마다 산마다 낱낱이 알겠더라(水水山山箇箇知). 소나무 잣나무는 푸릇푸릇 서 있고(松松栢栢靑靑立) 가지가지 잎새마다 만만 마디로다(枝枝葉葉萬萬節)." 반타작이라 한숨짓지 마라. 그나마 다행 아닌가.

맨몸으로 이 세상에 나와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 챙겼으면 됐다. 그것마저도 결국 나의 것이 아니다. 알뜰살뜰 챙길 생각 말고, 반타작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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