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시한을 맞추다 보면 삶을 정리하는 탐구가 되고 중요한 공부 형식도 된다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신청마감, 청약마감, 원서마감, 원고마감…. 휴,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듣는 말이 '마감'이다. 한자로는 '磨勘'이라 쓴다. '갈다'는 뜻의 마(磨) 자와 '헤아리다/조사하여 따지다'는 뜻의 감(勘) 자를 합친 것이다. 옛날 중국에서 '관리의 근무 성적을 심사하는 것' 또는 '향시(鄕試)·회시(會試)의 답안을 재심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마감의 뜻을 찬찬히 헤아려 보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마감은 '더 이상은 넘어갈 수 없는 한계선' 즉 '데드라인(deadline)'을 뜻한다. 글 쓰는 사람들은 늘 빚쟁이처럼 마감 시간에 쫓긴다. "마감이 언제인가요?"하고, 원고 청탁을 받을 땐 으레 묻는다. 하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되던가. 대부분 마감 직전에서야 겨우 원고를 끝낸다. 더러 그 시한을 훌쩍 넘겨 버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당연히 독촉 전화나 문자가 온다. 마음이 더 급해진다. 바쁜 탓에 깜빡했거나 그 순간까지 아예 손을 못 대고 있을 경우도 있다. 그럴수록 아예 느긋해질 때도 있다. 세월아 네월아 하는 용기마저 생기기도 한다. 내가 원고 독촉을 할 입장이 되었을 때 더러 배째라는 식으로 버티는 분들도 많았다. 속이 탄다. 그래도 그 글을 받으려면 꾹 참고 대책 없이 기다려야만 한다. 그나마 글이 나오면 천만다행. "아,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하며 중도에 포기하는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예가 있다. 마감공사, 마감작업, 마감재료…처럼 하고 있던 일을 잘 다루어 '끝맺음' '마무리 함'을 뜻한다. 미용에서 하는 마지막 손질인 '피니쉬(finish)'와 같다.

마감이 사람의 삶에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 정해진 목숨이 끝나는 경우 '삶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마감은 죽음을 맞이함 즉 '임종(臨終·death)'을 가리킨다. 이쯤에 몽테뉴의 '에세이'서문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이 책을 읽는 이여, 여기서는 나 자신이 바로 내 책의 재료이다. 이렇게도 경박하고 헛된 일이니, 그대가 한가한 시간을 허비할 거리도 못 될 것이다. 그러면 안녕" 글쎄, 서문에다 '그러면 안녕'이라고 적는 경우도 있나? 황당하다. 그러나 참 인간적이다. 몽테뉴는 서문 속에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오래잖아 그렇게 되겠지만)…'라고 적어두었다. 이 구절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면 안녕'이라는 것은, 짧은 그러나 쿨한 작별인사인 셈이다. 임종을 고하는 말이 장난기어린 듯 밝다. "굿바이 굿바이 그 인사는 정말 싫어/굿나잇 굿나잇 그 인사도 나는 싫어"라고 노래한 배호의 '굿바이'와는 다르다.

마감에는 더 특별한 뜻도 있다. 청나라 때의 양명학자 황종희(黃宗羲)가 편집한 '명유학안(明儒學案)'속에는 왕시괴(王時槐·호는 塘南)의 학문을 평가한 대목이 나온다. '팔십년마감지차(八十年磨勘至此)' 운운하는 구절이다. "80년을 마감하여서 여기에 이르렀다"는 뜻인데, 이 경우의 마감이란 '학문의 이치를 탐구하다'는 것. 그렇다. 마감 시한을 맞추다 보면 안다. 산더미 같은 생각들이 오히려 한계라는 압박속에서 간단 명료해지고,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막막함이 시간과 분량의 제한에서 잘 정리된다. 마감은 삶의 탐구인 셈이다.

마감이라는 감독이 나를 관리하고 있다. 수도 없이 나라는 삶의 내용을 줄이고, 다듬고, 따져댄다. 마감은 닦달이자 그 자체로 중요한 공부 형식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