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시한을 맞추다 보면 삶을 정리하는 탐구가 되고 중요한 공부 형식도 된다
우선 마감은 '더 이상은 넘어갈 수 없는 한계선' 즉 '데드라인(deadline)'을 뜻한다. 글 쓰는 사람들은 늘 빚쟁이처럼 마감 시간에 쫓긴다. "마감이 언제인가요?"하고, 원고 청탁을 받을 땐 으레 묻는다. 하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되던가. 대부분 마감 직전에서야 겨우 원고를 끝낸다. 더러 그 시한을 훌쩍 넘겨 버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당연히 독촉 전화나 문자가 온다. 마음이 더 급해진다. 바쁜 탓에 깜빡했거나 그 순간까지 아예 손을 못 대고 있을 경우도 있다. 그럴수록 아예 느긋해질 때도 있다. 세월아 네월아 하는 용기마저 생기기도 한다. 내가 원고 독촉을 할 입장이 되었을 때 더러 배째라는 식으로 버티는 분들도 많았다. 속이 탄다. 그래도 그 글을 받으려면 꾹 참고 대책 없이 기다려야만 한다. 그나마 글이 나오면 천만다행. "아,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하며 중도에 포기하는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예가 있다. 마감공사, 마감작업, 마감재료…처럼 하고 있던 일을 잘 다루어 '끝맺음' '마무리 함'을 뜻한다. 미용에서 하는 마지막 손질인 '피니쉬(finish)'와 같다.
마감이 사람의 삶에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 정해진 목숨이 끝나는 경우 '삶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마감은 죽음을 맞이함 즉 '임종(臨終·death)'을 가리킨다. 이쯤에 몽테뉴의 '에세이'서문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이 책을 읽는 이여, 여기서는 나 자신이 바로 내 책의 재료이다. 이렇게도 경박하고 헛된 일이니, 그대가 한가한 시간을 허비할 거리도 못 될 것이다. 그러면 안녕" 글쎄, 서문에다 '그러면 안녕'이라고 적는 경우도 있나? 황당하다. 그러나 참 인간적이다. 몽테뉴는 서문 속에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오래잖아 그렇게 되겠지만)…'라고 적어두었다. 이 구절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면 안녕'이라는 것은, 짧은 그러나 쿨한 작별인사인 셈이다. 임종을 고하는 말이 장난기어린 듯 밝다. "굿바이 굿바이 그 인사는 정말 싫어/굿나잇 굿나잇 그 인사도 나는 싫어"라고 노래한 배호의 '굿바이'와는 다르다.
마감에는 더 특별한 뜻도 있다. 청나라 때의 양명학자 황종희(黃宗羲)가 편집한 '명유학안(明儒學案)'속에는 왕시괴(王時槐·호는 塘南)의 학문을 평가한 대목이 나온다. '팔십년마감지차(八十年磨勘至此)' 운운하는 구절이다. "80년을 마감하여서 여기에 이르렀다"는 뜻인데, 이 경우의 마감이란 '학문의 이치를 탐구하다'는 것. 그렇다. 마감 시한을 맞추다 보면 안다. 산더미 같은 생각들이 오히려 한계라는 압박속에서 간단 명료해지고,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막막함이 시간과 분량의 제한에서 잘 정리된다. 마감은 삶의 탐구인 셈이다.
마감이라는 감독이 나를 관리하고 있다. 수도 없이 나라는 삶의 내용을 줄이고, 다듬고, 따져댄다. 마감은 닦달이자 그 자체로 중요한 공부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