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돈이 최고라해도 만물과의 교감 못 빼앗아가 삶은 받고 또 보내는 연습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시인
資本主義已最高(자본주의 돈이 최고). 대전의 어느 유명대학 벽에 적힌 글귀이다. 누가 일부러 써놓은 것이다. 학생들은 한자를 잘 모르니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좀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금방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하필 이 글귀를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물어볼 데도 없고 혼자 며칠을 생각해 보았다. 그래,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최고이지.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오죽 세상이 돈에 목말랐으면 대학 건물의 벽에다 이런 글귀를 써두었겠나. 개인도 돈, 사회도 돈, 대학도 돈, 모두 '돈, 돈, 돈'이다. 어차피 돈 버는 방법을 배우러 대학에 온다면 '돈 되는 ○○학' '대박 ○학' 뭐 이런 식으로 과목을 다 바꿀 수도 있겠다.

아는 사이에 보통 주고받는 말이 '대박나세요.'이다. '돈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아라'는 덕담이다. '대박, 대박'하고 외치는 이 시대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원치 않는다. 누구나 '배부른 돼지'를 원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영락없이 '돼지들의 왕국'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이 왕국에서는 목숨 빼놓고 돈으로 안 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리고 '비싼 것=있어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싼 것=없어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 멀쩡한 것도 싫증나면 버리고 새것으로 바꾼다.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은 자꾸 새로 바꾸고 자주 버리는 일이다. 젊고 활기찬 세대를 칭송하여 싱싱한 자본의 흐름을 추동해 가야한다. 헐렁하고 축 처진 것보다는 탱탱하고 날씬 한 것을 우상화한다. 닳아빠지도록 신고, 낡아빠지도록 입는 것이 줄어들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산다'는 관념도 사라졌다. 바꾸고 헤어지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세상이니 아마 황혼 이혼도 늘어나는 것이리라. 더 닳거나 낡기 전에 새것으로 바꾸려는 의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어제 서울 출장 중에 10년 이상을 써 왔던 노트북이 죽었다.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한 노트북이 숨을 거둔 것이다. 나에게 충성하다 노동 중에 순직하였다. 제법 덩치가 있고 묵직한 그놈의 시신을 앞에 두고 나는 슬퍼하였다. '아, 이럴 수가! 네가 황급히 떠나다니…' 착잡한 마음으로 급히 수리센터에 들렀지만 교체할 부품이 끊겨 더 이상 살릴 방법이 없단다. 이참에 새것으로 바꾸라 한다. 그야 어려울 것 없지만, 무생물도 정이 드니 떠나보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먼지 끼고 손때 묻은 노트북을 다시 가방에다 넣고 계단을 내려서는 마음이 참 무거웠다. 생명체(유정)만이 아니라 비생명체(무정)도 삶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래 전의 일이다. 10여년을 타고 다녔던 차가 주저앉고 말았다. 길가에 세워두었다가 폐기절차를 밟았다. 트렁크에 실린 짐을 마지막으로 깨낸 뒤 업자는 차를 끌고 갔다. 그 낡고 찌그러진 뒷모습을 쳐다보다 나는 그만 울컥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 삶의 주요 부분을 잃은 것처럼 차가 떠난 고개 너머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흐느끼는 일이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받아들이며 또 떠나보내는 연습이다. 누군가의 말씀이 책 속에 들어있 듯 물건 속에도 의미가 들어 있다. 그 의미는 물건의 진신사리이다. 사물을 매만진다는 것은 그것의 영혼에 닿는 일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돈이 최고'라 하더라도 만물과의 깊은 교감마저 앗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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