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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우리 땅 독도 지켰던 '영원한 촌장' 최종덕

가족·해녀 등과 마을화 추진 어업권 계약 등 영토 주권 행사 영유권 공고의 초석 마련 정부차원에서 기념비 등 설치해야

조준호 기자 cjh@kyongbuk.com 등록일 2015년11월10일 22시08분  
▲ 독도 서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최종덕씨.

옛부터 독도는 울릉도 주민들의 문전옥답 같은 삶의 터전이었다.

울릉도와 독도는 서로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 마주 볼 수 있었으며 울릉도 주민들은 맑은 날이면 바닷길을 건너 황금어장인 독도에서 조업을 했다.

독도는 시대에 따라 우산도, 가지도, 독섬 등으로 불렸다. 그만큼 오랜 세월 국민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며 특히 울릉도 주민들에게는 생업의 터전이었다.

독도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울릉도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울릉도 주민들의 생업의 현장인 독도가 근대 들어서 수탈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1883년 3월 조선정부는 울릉도 개척령 반포와 더불어 울릉도에 몰래 침입해 벌목을 일삼던 일본인들에 대해 도항금지령을 내려졌다. 이후, 얼마동안 울릉도 도항은 잠잠한 듯 했지만 그러나 일본은 군함을 동원해 무력을 써가며 울릉도 삼림의 대한 불법 벌목은 일삼았다.

▲ 독도에 주둔 하는 경찰병력을 수송시켜주고 있다.


일본은 합법적으로 울릉도, 독도와 국내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서 1889년 10월 조선과 '조일통상장정'을 체결, 법적 테두리를 만들어 일본인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조일통상장정은 불평등 외교의 대표적이다. 치외법권 규정에 넣어 불법을 일삼아도 조선조정이 이들에게 처벌할 수 없게 체결됐다.

이 규정을 빌미로 일본은 울릉도, 독도연안으로 진출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초기에는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은 경제성이 높은 재목의 벌목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조일통어장정(1889.11) 맺어지고 초대군수 배계주에 의한 벌목 단속이 강화되면서, 일본인의 울릉도로의 도항 목적은 벌목에서 어로활동으로 점차로 바꾸어져가게 된다.

그로 인해 독도 수탈이 시작됐다. 1905년 이후 일본인 어부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가 독도의 가치를 깨닫고 죽도어렵합자회사를 설립, 독도어업을 독점하며 바다사자와 함께 수산물 수탈이 자행됐다.

독도 바다사자 멸종은 일본에 의한 수탈의 증거였던 것이다. 비단 바다사자뿐만 아니라 전복을 비롯한 해산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광복 이후 또다시 우리나라는 남북이 갈라지는 비극의 길을 걸으며 경제기반 또한 붕괴됐다.

정치, 경제가 혼란한 시기에 동해 끝 섬인 독도에 대한 관심과 보전 보다 국내 산업의 활성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영토 야욕은 표면화 된 시기였다. 50년대 이런 일본의 야욕에 대항 하듯이 울릉주민들로 결성된 독도의용수비대와 경찰병력이 독도에서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국제법상 무인도의 경우 유인도에 비해 국제법에서 불리하다.

국민이 자기의 영토에서 어로(주권)을 행사 할 수 있다면 국제법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최초로 독도에서 거주하며 독도를 지킨 사람은 울릉도 출신인 어부 故(고) 최종덕(1925~1987)씨였다.

최종덕씨는 1964년 독도에 첫 입도 후 196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가족 및 주민들과 함께 독도에서 상주하며 어로 생활을 영위했다.

척박한 자연환경인 독도를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든 이가 바로 최종덕씨였다.

현재 독도는 정부 및 경상북도, 울릉군의 관심 속에 많은 예산이 투자돼 독도 지키기에 나섰지만 최종덕씨가 거주한 6~80년대 독도에는 모두 그의 손길이 거쳐지고 만든 것이었다.

▲ 가제바위에서 독도 거주민들과 함께 단란하게 해산물을 먹고 있는 최종덕씨.(오른쪽).


최종덕씨의 독도에서의 삶의 흔적이 바로 독도 영유권 공고의 초석이 된 것이다.

지금은 고인인 된 최종덕씨의 죽음 또한 독도와 상관있다. 지난 1987년 9월 태풍 '다이애나'로 독도 주거공간과 선가장 등이 모두 파괴됐다.

태풍피해의 국가 등의 지원보다 최종덕씨는 시설물 복구를 위해 재료 구입 차 육지에 나갔다가 울릉도로 돌아오는 길에 포항 버스터미널에서 뇌출혈로 생을 마감했다.

고인이 된 최종덕씨에 대한 자료는 그가 독도에 베푼 사랑보다는 많이 없다. 정부나 지자체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혼자 일구고 만들었기 때문에 사진을 비롯해 자료가 없는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독도 곳곳에 놓인 돌 하나, 풀 한포기에도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가족과 해녀 등을 이끌고 척박한 독도를 부락(마을)화 시켰기에 그는 독도의 촌장이며 정부였다.

정부와 경상북도 등이 꿈꾸는 독도영유권강화사업을 혼자 이룩한 것이다.

최종덕씨가 작고하자 정부와 경북도 등은 영유권 강화의 일환으로 현재 2대 독도주민인 김성도 부부를 독도에 거주시켰다.

일본의 영토야욕이 거세지자 현재 김성도씨에게 많은 언론에서 의미를 부여하며 각종 지원을 한다.

정부 및 지자체 등의 지원으로 거주하는 김성도씨와 달리 최종덕씨는 독도에서 생산된 해산물 등을 판매해 올린 수익으로 독도에 재투자를 하며 마을화 시키다가 생을 마감했다.

또한 일정부분을 울릉군 수산업협동조합 도동어촌계에 공동어장 어업권 계약을 맺고 꼬박 꼬박 지불해 독도 주권을 행사한 귀한 자료를 남겼다.

그는 첫 독도에 입도해 처음으로 독도에서 유일한 민물이 나오는 물골에 정착했다.

이후 현 독도 주민 숙소 인근지역에 이사, 선가장, 저장실, 주택 등을 지으며 자리를 잡았다.

최종덕씨는 독도가 주민공간으로 어느정도 모양새가 갖추자 가족과 함께 독도에서 생활했다. 딸 최경숙씨는 유년기뿐 아니라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독도에서 정착하며 둘 사이에서 딸을 출산해 최초로 주민등록상 독도둥이가 탄생했었다.

독도가 정부 및 경상북도의 관심으로 개발 할 당시 밑바탕이 되는 것은 모두 최종덕씨의 손으로 건설된 것이다.

▲ 1984년 독도 서도에 건설한 집터 및 선가장 모습.


그가 생존했을때는 지금보다 더 큰 부락을 형성했고, 어로 및 경제생활을 한 것은 우리의 영토주권을 행사한 증거이며 증인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독도에서 양식사업까지 시도했었다. 수탈의 현장인 독도를 어민들이 경영할 곳으로 변모시키고 싶은 그의 의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뿐만 아니라 독도 환경에도 큰 관심이 있었다. 독도에서는 환경보호를 위해 샴푸 등을 일절 사용 못하게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가 지금까지 생존 했으면 현재의 독도의 모습보다 더욱 주권을 행사하는 모습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작 독도 영유권을 지키고 독도 주민의 거주하기 위한 시설 등에 초석이 된 고 '최종덕'씨에 대한 흔적은 독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정부에서는 독도에 새로운 '안용복','이사부' 등의 새로운 지명을 부여했고, 독도경비대에서는 순직한 경찰관 기념비 등을 설치했다.

독도에서 순직하지 않았고, 정부의 도움 없이 독도를 지킨 울릉도 주민인 최종덕씨지만 국가가 힘든 시기 국민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시기에 독도를 지킨 독도부락의 촌장이며 그의 죽음도 독도의 삶의 일부였던 것이다.

조그만 기념비 하나라도 설치하든지 아니면 그가 일군 물골계단, 주민 숙소 등의 일부라도 최종덕의 이름을 부여하며 그의 흔적을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 독도에 거주한 故 최종덕씨의 사진은 최종덕기념사업회를 이끄는 딸 최경숙씨의 허락을 받아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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