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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可論의 똘레랑스

진보·보수, 여·야당 분쟁 A아니면 B라는 양 극단 탓 개인이 살아야 나라가 살아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등록일 2015년11월19일 21시55분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지금 상자 속에 갇힌 우울한 미스터 대한민국씨를 생각한다. 밖을 내다볼 수도 없고 전망을 상실한 그에게 나는 별 할 말이 없다. 한 마디로 서글프다. 눈만 뜨면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이라는 두 패거리 집단이 사흘이 멀다 찌지고 볶는다. 이런 양극의 사유에 갇힌 우리네 영혼들이 불쌍하다. 이상(李箱)은 소설 '날개'에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말을 내뱉었다. 일제강점기에 시, 소설, 수필 그리고 건축 설계 방면에까지 시선이 닿아 있던 융합적 작가 '이상(李箱)'은 필명이다. '상'은 '상자=박스'이니 '이 상자=박스'이다. 그는 그것도 모자라 박제라는 이미지를 더한다. 애당초 날개는 펴보지도 못하게 된다. 우리 사회 꼬라지가 이렇다. 날아야 할 날개는 상자 속에서 처박혀 박제가 되어 있다.

원효는 '이변이비중'(離邊而非中)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변'이란 '양 극단'을 벗어나는=떠나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여기부터이다. 양 극단을 벗어난다고 하면 우리 뇌는 바로 '중도' 개념으로 향한다. 그러나 극단을 벗어난다는 말이 별도로 상정한 '가운데'가 '아니다'라고 대못을 친다. 퇴로를 차단한다. 양극단이니 중도니 하는 개념들 자체가 우리들이 만들어낸 허상이고 픽션 아닌가. 모두 허망한 잡념, 잡음들이다. 이런 허접한 생각쓰레기를 걷어치운 바로 그 자리에 진정한 세계가 가득 차 있다. 양 극단의 칼날들을 두들겨 패서 '가운데'로 몰아간다는 것도 대안이 아니다. 본래 자연에는 이쪽도 저쪽도, 그 사이의 중간이란 것도 없다.

이 땅에 살면 참 곤혹스럽다. 배운 놈이건 안 배운 놈이건 A아니면 B라는 이분법을 짊어지고 다닌다. 작두 같은 틀에 몸서리친다. 나는 나를 위해 살고 싶지 어느 편에도 서고 싶지 않다. 누구의 손도 들어주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편이지 다른 누구의 편이 아니다. 미안하다. 어느 한편에 빌붙어 떼 지어 몰려다니며, 밥 먹고 술 마시고 노래하는 그럴 시간이 나에게는 없다. 생각의 편당을 갈라 패거리로 사는 사람들의 뇌 속은 아마 불만과 불안으로 가득하리라. 혼자서는 우뚝 서지 못한다. 늘 불안한 눈은 그 무엇에 맹목적으로 빙의되어 있다. 이런 패거리 향촌질서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니체의 조언은 눈물겹다. "이 세상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너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고 어떻게 걸을 것인가?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마라. 또한 묻지 말고 그저 걸어가라. 그 길은 네가 가기 전에는 형태도 존재도 없다. 오직 네가 걸어감으로써 위대한 길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묻지 말고 걸어라. 자신의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때, 사람은 가장 강하게 분발하는 법이니까"

미스터 대한민국씨는 양 극단 어딘가에 칩거하도록 만드는 자폐적 사유의 틀부터 쓸어내야 한다. 그 자리에 전망이 나타나는 법. 일단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두어야 한다. 나도 허하고 남도 허하라! 모두 관용해야 각 개인이 튼튼해진다. 개개인의 판단이 살아나야 나라가 산다. "상반되는 것이 동시 성립하는 것을 양가라고 한다"(相反而相成謂之兩可)는 양가설(兩可說)에 눈길을 돌린 근대의 지식인이 있었다. 모든 것을 허하라는 양행론(兩行論), 우리 속의 똘레랑스 전통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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