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명희)서울 성북구)

손을 더듬어가며 자밀을 찾았다. 그러나 옆에 있을 그가 없었다. 잠이 깬 나는 가까스로 방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나는 구석방의 문을 밀고 홀 쪽으로 나갔다. 홀의 한쪽 구석에 쌓아둔 방석더미 위에 꿈틀거리는 물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어스레한 홀을 가로질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놀랍게도 희끄무레한 어둠 속의 그 물체는 잔뜩 몸을 웅크린 자밀이었다. 자다 말고 추운 밤에 왜 거기 나와 있을까.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사진으로 보았던 눈이 큰 안경원숭이를 생각했다. 안경원숭이도 뭔가를 생각할 때 눈이 그렇게 더 커지는지는 잘 모르지만.

구석방으로 햇빛이 들어온 것은 자밀이 떠난 후 1시간이나 지나서였다. 그는 포천으로 떠나며 한동안 오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가 누웠던 자리에 한 움큼 남겨진 따뜻한 기운을 느끼며 그를 생각했다. 그를 생각하고 있으면 가슴속에 종양처럼 박혔던 불덩이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자주 얼굴을 보는 것도 아닌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은, 자밀이 처음 나의 구석방에서 자고 간 후 방 안으로 햇빛이 들어온 것이다. 창문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면이 벽으로 막힌 구석방에는 빛 한 점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에 바늘귀만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 빛은, 조금씩 커지더니 100원짜리 동전만큼 커졌다. 언제부터, 어떻게, 그렇게 큰 구멍이 되었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는 단지 구석방의 벽체를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햇빛을 통해 아침이 왔다는 걸 깨달을 뿐이었다. 내가 어둡고 구석진 곳을 두려워하는 만큼, 나는 그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이 좋았다. 그리고 구석방에 햇빛이 들어오면 나는 늘 자밀이 생각났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 혜화동 로터리에서였다. 쉬는 날 구석방에 하릴없이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은 나에게 죽음과 같았다. '밖으로 나가야 해. 나가서 걸어야 해.' 내 가슴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나를 밖으로 나가라고 외쳤다. 어느 쉬는 날 오전, 나는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갔다. 딱히 가야할 곳도 없었다. 내가 일하는 안국동 음식점의 구석방을 나온 나는 그냥 걸었다. 한참 걷다보니 창덕궁을 지나고 있었다. 창덕궁을 지나 다시 창경궁 정문을 지나고, 계속 걸어서 혜화동 로터리까지 왔다. 분수대 옆의 작은 언덕배기에 성당이 보였다. 성당의 육중한 출입문 앞에는 누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가가 문고리를 살며시 잡아당겨보았으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부님 강론 중이십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어떻게 알았는지 노란색 어깨띠를 두른 남자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성당 안은 외국인들로 꽉 차있었다. 외국말로 강론을 하고 있어서 나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먼 나라에서 왔을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빼곡히 모여앉아 미사를 드리고 있는 광경은 오히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미사가 끝나자 혜화동 로터리의 분수대 옆 거리는 순식간에 외국인들로 붐비는 장터로 변했다. 물건을 내놓고 파는 사람들이나 좌판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나 모두가 동남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 같았다. 좌판에 벌려놓은 먹을거리는 고작 과자나 통조림, 치즈, 소시지. 말린 물고기 따위의 인스턴트식품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서로 웃음을 나누고 떠들며 축제에라도 온 듯 들떠있었다. 한글 밖에 모르는 나는 좌판 위의 외국말로 쓰인 상품 이름들을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글씨가 박힌 포장지만 보아도 잠시나마 고국에 온 감격을 맘껏 즐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좌판 한켠에 투명비닐봉지에 포장된 길쭉한 쌀이 놓여 있었다. 예전에 몇 번 밥을 지어먹기도 했던 안남미 보다 두 배는 길었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외국음식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내가 좌판의 쌀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한 사내가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누구시죠?"

나는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저는 자밀이라고 합니다."

그가 나에게 명함을 주며 말했다. 나는 얼떨결에 그의 명함을 받았다. 고딕체의 한글로 쓴 이름 옆에 그의 웃는 얼굴이 컬러로 박혀 있었다.

"아미르 자밀……, 혹시 저를 아세요?"

"네, 안국동 식당에서 보았어요."

그의 말에, 나는 이마에 주름을 잡고 그의 짙은 갈색얼굴과 유난히 큰 눈을 응시했다. 푸르고 서늘한 큰 눈, 그리고 90년대에나 유행했을 커다란 잠자리테 안경은 내가 그를 기억해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주방 일을 하다가도 일손이 모자랄 땐 홀에 나와 서빙도 했다. 그는 언제나 혼자 왔으며 말이 없고 조용했다. 음식 주문을 할 때도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했다. 그럴 땐 그의 큰 눈은 그를 착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그래요, 기억이 나요. 그런데 어느 나라세요, 필리핀?"

"아니요, 파키스탄입니다."

"한국말을 잘하시는데 얼마나 되셨어요?"

"5년이요."

그는 180미터가 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마른 편의 체구였다. 하지만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는 품위가 있어보였다.

"성당에 오셨어요?"

"아니에요. 어머니한테 돈을 부치러 왔어요. 혜화동에 오면 휴일에도 저기서 송금을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분수대 옆에 주차해 있는 다코타 대형 픽업트럭을 가리켰다. 차 앞에는 '신속한 송금을 하려면 휴일에도 문을 여는 웨스트 유니온 은행을 이용하세요.' 라는 광고판이 서 있었다. 그는 한글 외에도 영어는 물론 필리핀의 공용어인 타갈로그어, 그리고 파키스탄 국어인 우르드어로도 함께 써놓았다고 말해주었다. 자밀은 이거 볶음밥 해먹으면 참 맛있어요, 라며 '파키스탄 찐쌀' 한 봉지를 사주었다. 좌판의 길쭉한 바로 그 쌀이었다. 우리는 내가 식당일을 쉬는 날에 혜화동 장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자밀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고 있던 나는, 누운 채 방안을 둘러보았다. 구석방에 외줄기 햇빛이 들어오면, 나는 예약시간에 맞춰 작동하는 디브이디 레코더처럼 눈을 뜬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천장과 벽을 훑어본다. 방에 빛이 들어오면서부터 반복해오고 있는 나의 습관이다. 나는 오늘이 두 주에 한 번꼴로 쉬는 일요일이란 걸 기억하고 있었다. 모처럼 성당에 갈 채비를 하려고 몸을 일으켜보지만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을 비틀 때마다 캐시미론 솜이불에서 배어나는 땀 냄새가 역겨웠다. 몸을 옆으로 뒤척이자 미세한 부유물들이 한 줄기 햇살마저 희부옇게 오염시켰다. 나는 본능적으로 빛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서서히 숨을 들이마신 다음 낮게 뱉어냈다.

구석방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생명은 짧았다. 빛이 지나간 방안은 다시 어둠속에 잠겼다. 빛이 사라진 구석방은 언제나 죽은 숲처럼 회색빛으로 칙칙하고 싸늘했다. 구석방 생활에서 가장 힘든 건 방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지난밤에도 늦게까지 주방을 지키다 미처 치마도 벗지 못하고 자빠져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먼저 잠자리에 든 자밀이 그륵그륵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거칠게 코를 곯았다. 그에게 등을 붙이고 누운 나는 꽁꽁 얼었던 몸이 녹으며 금세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결에 누군가 내 목을 짓누르며 나를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의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내 몸뚱이에 올라타서 가슴을 마구 짓밟았다. 나는 그만하라며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쳤지만 몸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2층의 구석진 다락방으로 나를 끌고 갔다. 여러 명이 달려들어 내 몸을 짓누르고, 한 아이가 끝이 예리한 대못으로 내 허벅지를 찔렀다. 하얀 시트 위에 핏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팔과 다리를 붙잡힌 나는 아픔을 호소하며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숨통이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며 몸을 버둥거렸다. 이제 그만 해, 그만하란 말이야! 나는 힘을 다해 외쳤다. 하지만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며 엉엉 울다가,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이불 속은 땀으로 끈적거렸다. 축축한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주르르 이마에 묻었던 땀방울이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렸다. 몸을 일으켜보려 하지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나는 쥐잡이 끈끈이에 발목이 잡힌 비둘기 같다고 생각했다. 끈끈이에 붙은 발을 떼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더욱 세게 달라붙었다. 나는 힘없이 어깻죽지를 떨어뜨린 채 전기장판 위에서 가쁜 숨만 내쉴 뿐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복되는 현실과 꿈의 악순환이 이어지며 나는 점차 무력해지고 있었다. 나의 무력감을 부채질하는 가슴속 불덩이는 아마도 아동상담소 기숙사에 갇혀 지낼 때 생겼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여덟 살 되던 해의 어느 날, 엄마는 내 손을 끌고 2층짜리 낡은 건물 두 개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담쟁이넝쿨이 건물의 갈라진 벽을 타고 손을 뻗쳐 기어오르고 있었다. 건물 앞에는 꽤 넓은 운동장이 있었다. 나는 학교에 온 것이라고 느꼈다. 아니, 학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학생은 없었다. 엄마와 함께 현관문을 들어설 때, 나는 얼핏 시립아동상담소라고 아래로 내려쓴 간판을 보았다. 엄마는 나를 밖에 세워둔 채 '교육과'라는 방으로 들어갔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한 남자와 함께 엄마가 그 방에서 나왔다. 나에게 엄마가 다가와서 말했다. 지금은 엄마가 널 키울 능력이 없어. 당분간 여기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어. 그러면서 엄마는 나와 키 높이를 맞추어 쪼그려 앉아서 내 허리를 힘껏 끌어안아주었다. 나는 엄마와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엄마 품속에서 꺽꺽 마른 울음을 삼켰다.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돼. 나를 타이르는 엄마의 눈도 물기로 젖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널 데리러 올 때까지 잘 참고 있어야 해. 알았지? 엄마는 한참동안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엄마는 그 뒤로 영영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기숙사에서 함께 지낸 여자아이들은 모두 30여명이었는데, 6살부터 많게는 18살까지 여러 층이었다.  

멀뚱멀뚱 천장을 쳐다보던 나는 스탠드 스위치를 찾으려 머리맡으로 손을 뻗었다. 스위치는 화장대 위에서 방바닥까지 늘어진 전깃줄 끝에 달려 있었다. 불을 켠 순간, 전기스탠드 옆의 사진에 눈이 갔다. 혜화동에서 자밀과 처음 만난 지 서너 달 지났을 즈음, 필리핀 여행 때 찍은 거라며 그가 준 것이었다. 자밀과 한 여자가 웃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뒤쪽에 작은 원숭이 한 마리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신기해요. 원숭이 얼굴에는 눈만 있어요."

"안경원숭이에요. 작은 병아리만한데 만약 사람 정도의 몸집이라면 눈은 커다란 사과만할 겁니다."

그러면서 자밀은 웃으면서 자기 눈이 안경원숭이만큼 크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의 눈을 자세히 보니, 말대로 정말 컸다. 보통 사람의 눈보다 배는 큰 것 같았다. 

"그런데 뭘 먹고 살아요? 일반 원숭이처럼 바나나, 아니면 사과?"

"아뇨, 주로 곤충을 잡아먹지만 새나 파충류도 먹어요. 간혹 치명적인 독을 가진 독뱀도 사냥해요."

"순한 모습과 달리 독뱀까지 먹다니 무서워요."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정말로 무서운 생각이 들어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머리통보다 큰 눈을 가진 안경원숭이는 아주 선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서식지인 필리핀의 보홀섬을 떠나면 녀석은 스트레스를 받아 곧 죽고 만다고 자밀이 말해주었다. 안경원숭이는 제가 살고 있는 곳을 옮기면 죽는다. 그럼 나도 구석방을 떠나면 죽을까,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것들을 구태여 알려고 노력해보았자 별다른 답을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답을 찾았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죽어도 좋으니 대체 이 방에서 내가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그게 더 궁금했다.

그런데 사진 속의 자밀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일까. 여자는 즐거운 표정을 지은 채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문득, 나는 그 여자가 궁금해서 자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자밀, 이 여자는 누구예요? 제 누나예요. 그가 누나라고 한 여자를 바라볼 때면 웬일인지 나는 엄마를 따라 외할머니 댁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둡고 구석진 곳을 무서워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장 오랜 기억은 외갓집 뒤란의 광 속에서 무서움에 떨던 일이었다. 엄마는 내가 말을 듣지 않거나 나쁜 짓을 저질렀을 땐 나를 광에 가두는 벌을 주었다. 광은 어둡고 습했다. 그 속에 잠시만 있어도 시큼시큼하고 퀴퀴한 냄새로 두통이 밀려왔다. 광 속에는 녹이 쓸거나 자루가 빠진 호미, 낫 따위와 깨어진 장독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밟고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발바닥이 찔리기도 했다. 오래된 나무문이 바람에 삐걱거릴 땐 나는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온몸을 움츠렸다. 이 안에서 반성하고 있어. 그러고 나서 엄마는 철컥, 자물쇠를 채우고 사라졌다. 나는 엄마가 다시 나를 광에서 꺼내줄 때까지 눈물을 삼키며 기다려야 했다.

사진이 든 유리액자는 먼지와 파리똥으로 군데군데 얼룩이 졌다. 더러워진 액자를 닦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순간, 액자를 손으로 움켜쥐고 정말로 방 한가운데 똑바로 서 있는 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윗몸조차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없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액자의 유리에 입김을 불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웃고 있는 자밀의 얼굴을 닦았다. 그가 나의 구석방에 처음 왔던 날도 오늘처럼 윙윙 나뭇가지가 우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찬바람이 벽을 타고 내려와 이불 속까지 파고들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나는 차가운 기운에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때, 쿵쿵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식점 간판의 바깥 조명등을 끄고 자리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영업이 끝난 시간에 찾아올 손님은 없을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불 속에서 나가기가 싫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불편했다. 혹시 누군가 급한 일이 있어 찾아 온 건 아닐까. 잠옷 위에 오리털 파커를 겹쳐 입은 나는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얼굴에 확 밀려들었다. 문밖에 자밀이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가로등 불빛에 희끗희끗 날리는 눈발이 어수선하게 비쳤다. 그의 어깨와 머리에 눈이 덮혀 있었다. 죄송해요. 소주 한 잔만 주세요. 너무 추워요. 그가 손을 입에 대고 호호 불었다. 영업시간이 끝나서 안 돼요. 나는 그의 요청을 딱 잘라 거절했다. 한 잔만 마시고 갈게요. 그는 푸르고 큰 눈의 초점을 내 눈에 맞추며 말했다. 그는 아주 어려운 얘기를 꺼낼 때마다 눈이 더 커졌다. 그럴 땐 안경원숭이 눈보다 더 커졌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를 안으로 들오게 했다. 그런데 추운 겨울밤, 한데나 다름없는 홀에 마냥 그를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나만의 은밀한 공간인 구석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소주 한 병과 안주 몇 가지를 내놓았다. 그러나 그는 술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오도카니 방석에 앉아있기만 했다. 그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그는 정말로 딱 소주 한 잔만을 마신 후, 긴장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랬어요. 저와 결혼해주세요. 그리고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달아나듯이 방을 나갔다. 그가 앉았던 자리에 차가운 바람이 스쳐갔다. 창문들이 덜커덩 덜커덩 흔들릴 때마다 내 마음도 흔들렸다. 나뭇가지들이 더욱 세게 우웅우웅 소리를 내며 울었다.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느닷없이 그의 청혼을 들은 나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청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착하게 보이는 큰 눈에 말수가 적은 그가 이따금 든든하고 미더워 보였다. 하지만 내 마음이 그에게 선뜻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액자를 닦느라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눈을 감으면 또 다시 금방 잠이 들 것만 같았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밤이면 아동상담소 기숙사에서 함께 지낸 아이들 꿈으로 시달리던 나는, 희한하게도 자밀이 우르드 말을 가르쳐 준 날에는 악몽에서 벗어났다. 주방에서 일하다가도 나는 홀 쪽을 응시하며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아쌀라 말리꼬, 안녕하세요. 자밀은 나를 보면 우르드 말과 한국어로 인사했다. 슈크리아, 감사합니다. 나도 그가 가르쳐준 말로 인사를 받으면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우리나라 가려면 한국에서 비행기로 11시간 걸려요. '파키스탄'은 신성한 나라, 순수한 땅이란 뜻이에요. 내가 틈을 봐서 주방에서 나와 잠깐 그의 옆에 앉으면 그는 자신의 나라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나는 그의 나라와 그가 살았던 고향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다. 특히, 나는 그의 나라에서 공용어로 쓰는 우르드 말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곡선으로 된 우르드 글자를 한 글자씩 한 글자씩 써나가면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언젠가 자밀이 우르드 글자로 만든 그림 사진을 스마트폰에 담아 와서 보여주었는데 마치 우리의 동양화 같았다.

얼룩을 닦은 액자를 다시 화장대에 올려놓았다. 액자의 얼룩은 물론, 천장의 낡은 도배지에 닥지닥지 종기처럼 말라붙은 파리 똥, 기름에 절어 누렇다 못해 거무튀튀하게 색이 변한 벽지, 그것은 나에게 아주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짙은 기름때가 묻은 다릅나무 십자가는 고유의 나뭇결과 색상을 잃고 시꺼멓게 찌든 채 벽에 매달려있다. 세례식 때 필리핀 신부님이 나에게 준 것이었다. 친구가 없는 나는 그 신부님에게 혼자 교리를 배우러 다녔고, 그 후에도 그가 집전하는 외국인 미사에만 참석했다. 부활절이 오면 매년 바꿔 걸었던 십자가상 위의 향나무 가지는 하얗게 마르고 먼지만 쌓였다. 방안의 가구래야 조립식 옷장 한 개, 거울이 달린 작은 화장대와 오단 서랍장, 그리고 이불을 넣어두는 장롱이 전부였다. 얼마 전에 산 디지털시계만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이라고 알려주려는 듯 헐떡이고 있었다. 하지만 자밀은 나와 결혼하면 내 구석방에서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덟 살이나 많은 내가 자기에게 말을 놓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뜻에 따라 그를 동생처럼 대하기로 했다. 한번은 또 자밀이 나의 구석방을 부러워하면서 말했다.

"공장사람들과 지내는 쪽방보다 크고 좋아요. 이런데서 한 번 살아보고 싶어요."  

"얼마나 좁은데 그래?"

나는 그가 말하는 쪽방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어서 물었다.

"나 혼자 누워도 꽉 차요."

"그렇게 좁아?"

"그나마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돈이 없어 쪽방에도 못 들어가요."

"그럼, 그 사람들은 어디서 자?"

"일이 생길 때까지 하루에 7천 원을 내고 여러 사람이 함께 자는 '일방'이나, 그보다 싼 컨테이너 방에서 자요. 어떤 사람은 아예 노숙을 해요."

말하는 그의 커다란 눈을 바라보며 나는 안경원숭이의 눈을 떠올렸다. 언제나 느끼는 일이었지만, 자밀이 뭔가 어려운 얘기를 꺼낼 때나 나에게 사랑의 얘기를 할 때면 그의 눈은 늘 그렇게 더 커졌다.

내가 식당의 구석방에서 생활한지가 15년, 16년, 아니 그 보다 더 오래 되었을지도 몰랐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잘 가늠이 되질 않았다. 구석방은 홀의 한 쪽 끝자락에 소나무 판자로 칸막이를 해서 만들었다. 홀의 나무 바닥이 그대로 이어져 내 구석방의 바닥이 되고, 시멘트블록으로 쌓아올린 홀의 외벽이 방의 바깥 쪽 벽체가 되었다. 구석방의 천장과 벽은 통째로 베이지색 벽지를 발랐다. 창문 하나 없이 꽉 막힌 방이라 좀 밝은 색상을 선택했다. 방바닥엔 처음에 나일론 장판을 깔았다. 계절이 바뀔수록 장판은 점차 쪼그라들거나 딱딱해져서 귀퉁이가 부러졌다. 그래서 작년에 그동안 사용해온 비닐 장판을 걷어내고 황토색 합성수지 장판으로 바꿔 깔았다. 그것은 순전히 나를 위한 주인아저씨의 배려였다. 두터운 합성수지 장판은 탄력이 있고 따듯해서 겨울나기도 전보다 수월해졌다. 그러나 벽지는 처음 도배를 한 후 여태껏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그런데 작은 창문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자밀이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구석방에 창문이 있을 필요성은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식당일은 항상 밤 10시를 넘겨서야 끝났다. 고된 하루 일이 끝나기 무섭게 곧장 나는 방바닥에 몸을 던져 잠만 자면 되었다.

벽에 기대어 앉았던 나는 천천히 벽을 짚고 일어섰다. 그때 나뭇가지 사이를 쏴아 하고 빠져나가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마치 여름철 한바탕 쏟아지는 소낙비 소리 같기도 했다. 제길, 한겨울에 갑자기 소낙비를 떠올리다니. 어쨌든 그 소리를 듣던 나는, 문득 비를 맞은 안경원숭이는 어떤 모습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가을 어느 날 밤늦게 찾아온 자밀이 떠올라서였다. 커다란 눈에 초췌한 모습의 그는 마치 비 맞은 안경원숭이처럼 풀이 죽어있었다. 안경원숭이가 비를 맞았을 때도 과연 그런 모습일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가 불쑥 방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놓칠 뻔 했다. 나, 할 말 있어요, 라고 그가 말할 때 입에서 독한 술 냄새가 확 풍겨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니, 자밀, 술 마셨잖아!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가 술을 취하도록 마신 걸 보았다. 무슬림인 그가 술을 마신 것을, 게다가 그가 술에 취하도록 마신 사실을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컸다. 그는 방바닥에 주저앉아서도 나, 할 말 있어요, 라는 말만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사실 술에 취한 그를 볼 때부터 나는 짜증이 났고, 그의 그런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대로 보고만 있던 나는 그의 말에 퉁명스럽게 그렇게 대꾸했다. 나, 당신하고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나는 그의 커다란 눈을 바라보며, 지금 그가 나에게 꺼내기 힘든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계속 대답을 해달라고 졸랐다. 오늘 출입국관리사무소 사람들이 회사를 덮쳤어요. 불법체류자는 다 잡혀갔어요. 나도 곧 지금 다니는 회사와 고용계약기간이 끝나요. 나 당신하고 결혼해서 한국에서 계속 일하고 싶어요. 나 고향 가고 싶지 않아요. 우리나라 가면 압력밥솥 만드는 일 없어요. 자밀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나에게 매달렸다. 힘들어하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지나온 내 모습들을 떠올렸다.

내가 절망뿐인 상담소 기숙사에서 뛰쳐나온 것은 열여섯 살 때의 어느 봄날이었다. 아이들의 집단폭행과 따돌림은 내 마음을 모래바닥처럼 메마르고 거칠게 만들었다. 나는 외로움과 정신적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기숙사를 나온 나는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았고, 냄새가 나거나 상한 듯한 음식은 지하철역 화장실 세면대에서 씻어서 먹었다. 가끔 부패한 음식을 먹고 며칠씩 앓아눕기도 했다. 그럴 땐 나는 엄마를 보고 싶은 고독과 싸움을 하며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상담소 시설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

그런 어느 날, 나는 지하철역에서 함께 지내던 40대의 한 여자노숙인의 소개로 용산역 뒤편의 쪽방촌으로 몸을 피했다. 비바람만 겨우 막을 수 있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닥지닥지 붙어있는 한 평 남짓한 방의 벽에는 바퀴벌레들이 기어 다녔다. 쪽방촌 사람들은 삼만 원을 주는 '아저씨'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몸을 허락했다. 나는 그곳으로 나를 데려다준 노숙녀의 소개비를 갚아야 했다.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나도 그들과 똑같이 그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매일 방안에 내 울음소리가 가득 차도록 울었다. 내가 숨 쉬는 공기는 이불에서 배어나는 쾌쾌한 정액 냄새와 뒤섞여 썩어갔다. 결국 나는 두 달을 견디지 못하고 쪽방촌을 도망쳐 나오고 말았다.

그 후, 나는 몇 곳의 노숙지를 거치고 굴러다니다 지금의 음식점 구석방까지 흘러왔다. 그동안 나는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 이제 나이가 마흔인데, 내가 바라는 것은 마음 맞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내 집에서 살아보는 것이었다. 나는 안방이란 개념조차 모르고 살았다. 나는 오직 가족들과 살게 될 따뜻하고 아늑한 방을 꿈꿔왔다. 만일 방이 둘 있는 집에 살게 된다면, 조금 큰 방은 첫 번째 아이에게, 그보다 작은 방은 두 번째 아이에게 주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용할 방은 부엌 귀퉁이 작은 공간이어도 좋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몸이 딱 붙어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이면 충분했다. 거실은 크지 않아도 좋으니 아침저녁 식구들이 함께 어울려 서로의 몸을 부닥치며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는 공간이기를 상상했다.


세수를 하면서도 나는 자밀과의 결혼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나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성숙한 여자로서 나의 자리를 찾고 싶었다. 나와의 결혼을 다그치는 그의 속내를 설사 다 알 수 없다하더라도 나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는 예의바르고 부드럽고 친절했다. 한국말이 좀 서툴긴 해도 언제 배웠는지 그는 우리의 문화와 예법에 익숙했다. 그와 가까워지면서 나는 가끔 잠자리도 같이 했다. 그와 함께라면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나는 오히려 내가 그의 마음을 훔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는지도 몰랐다. 그의 청혼은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처럼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지난가을, 그가 나와의 결혼을 말할 때 나는 계속 침묵했었다. 그를 알은 지 2년여의 세월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내는 데 필요충분한 시간은 되지 못한 것 같았다. 술에 취해 방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그는 내가 기대하고 믿었던 사람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보였다. 그의 술버릇을 의식하게 된 것은 그 몇 달 전부터였다. 바늘귀만큼 작은 틈새로 들어온 햇살이 큰 구멍이 되는 걸 보면서, 나는 그 어떤 큰 문제도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결혼 재촉에 내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내 마음속 한 구석에 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깨어지는 아주 작은 틈새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점차 그는 내가 꿈꾸던 가정을 함께 만들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그에 대한 실망의 감정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선뜻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화장대에 앉아 화장을 하는데, 자꾸만 자밀에게 눈길이 갔다. 사진 속에서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지금 나는 무슨 이유로도, 그리고 그 어떤 것으로도, 내 마음을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그의 청혼을 당장 받아들여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지 않은가. 혼란스런 내 머릿속을 어떻게 추슬러야할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젯밤에 느닷없이 나타난 자밀이 하던 말을 떠올리면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를 본 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그동안 그는 전화나 문자도 없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 맥없이 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또 술 마셨어? 아니요. 그럼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별일 아니에요.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지난달에 고용계약기간이 끝났어요. 그래서? 사장은 곧바로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고용해지 신고를 했어요. 그럼, 끝난 거야? 그러나 그는 머리만 옆으로 흔들 뿐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스탠드 등을 뒤로하고 앉은 그의 얼굴에 그늘이 져서 그의 표정을 자세하게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에 스민 고뇌를 보았다. 나중에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별일이 아닌 게 아니었다. 그는 귀국과 불법체류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사장은 내가 회사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었어요. 불법이지만 밥솥 만드는 공정에서 가장 핵심인 황금도금 기술을 가진 내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거 잘 됐네. 그런데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보여? 문제가 있어요. 무슨 문제? 사장은 나를 자기회사에 숨겨주는 대신 월급을 반으로 깎겠다고 했어요. 그건 말도 안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자밀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오늘 돈을 받고 보니 정말 반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서, 가만있었어? 내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높고 심하게 떨렸다. 아뇨, 나는 사장실로 찾아가서 전에 받던 대로 월급을 다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랬더니 사장은 야, 이 자식,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긴 대한민국, 코리아란 말이야. 널 감춰주고 있는 것만도 감사할 줄 알아야지. 또 한 번 그런 얼빠진 소릴 하면 당장 추방시켜버릴 거야, 라고 말하며 나를 사장실 밖으로 내쫒았어요. 나 불법체류자 되는 거 싫어요. 한국에서 계속 일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울먹였다. 저녁을 먹은 후, 그는 내 구석방에서 먼저 잠이 들었다. 음식점 간판 조명등을 끈 다음 자밀의 옆에 누운 나는 그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새끼, 정신 똑바로 차려. 뭐, 월급을 다 달라고? 건방진 놈. 사장은 자기의 옷소매에 매달려 울먹이는 자밀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자밀은 앞으로 고꾸라지며 코피를 흘렸다. 사장은 넘어진 그의 등에 침을 탁, 뱉고 가버렸다. 자밀의 말 때문이었을까, 나는 악몽에 시달리다 잠에서 깼다. 기숙사 아이들이 대못으로 내 허벅지를 찌르는 꿈을 꾼 뒤의 또 다른 악몽이었다. 손을 뻗어 자밀을 찾았지만 그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그는 어두컴컴한 홀의 한쪽 구석에 쌓아둔 방석더미 위에 한동안 쪼그려 앉았다가 아침도 먹지 않고 일터가 있는 포천으로 황급히 떠났다.  

정수기에서 냉수 한 컵을 받아든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하늘이 무거웠다. 바람 한 점 없는 아침에 주위는 더욱 괴괴하고 적막했다. 현관문을 밀고 나가려는데 불현듯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자밀이 떠난 후 서랍장 속을 확인해보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녀석은 사람도 죽일 만큼 치명적인 독을 가진 독뱀도 잡아먹어요. 얼핏, 그가 말해준 안경원숭이의 먹이습관이 머리를 스치며 나는 더욱 불안해졌다. 나는 급히 방안으로 되돌아와 서랍장의 맨 아래 칸을 연 다음, 옷가지 밑으로 천천히 손을 밀어 넣었다. 통장 2개와 인감도장이 손에 잡혔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3천만 원짜리 정기예금 통장과 월 10만 원씩 붓고 있는 적금통장이었다. 결혼자금? 나는 서랍장을 닫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잠시나마 그를 의심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통장을 확인하고 막 방을 나오려는데, 사진 속의 두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순간, 혹시 그들이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이 아닐까, 라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슬람국가에서는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럼 이 여자도 자밀이 결혼하여 고향에 두고 온 여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여자와 함께 있는 자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결혼하자는 그의 말을 정말 믿어도 될까? 내가 괜히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러면서 나는 자밀에게 씽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그도 나를 따라 웃는 것 같았다.


새벽에 자밀을 보내느라 잠을 설쳐서 그런지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내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성당 입구의 둔덕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혜화동 로터리를 돌아가는 차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문자가 왔음을 알리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나 강제출국 당해서 보호소에 있어요. 내일 떠나면 한국에 다시 못 와요.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사랑해요. 샬롬!'

나는 한참동안 자밀이 보낸 문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며 땅이 막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손과 온몸이 마구 떨렸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오늘 결혼날짜를 잡자고 그에게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큰 눈을 더 크게 뜬 채 이 문자 글을 보냈을 것이었다. 그는 아주 어려운 얘기나 사랑의 얘기를 할 때마다 늘 그렇게 눈을 크게 떴으니까.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를 만나고 어디로 흘러갈 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에게 구석방이 없었으면 길거리를 굴러다니는 나뭇잎처럼 많은 사람들의 발굽에 차이며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게 살아왔을 것이었다. 내가 세상을 굴러다니다 찾아든 그곳, 구석방은 살만한 곳이었다. 그곳마저 없었다면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내 삶이 언제 멈출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보면 세상에 나의 구석방만큼 자밀과 나만을 위한 특별하고 완벽한 공간도 없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혜화동 로터리의 분수대 거리는 동남아인들로 붐비는 장터가 되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노점상을 둘러보았다. 좌판의 '파키스탄 찐쌀'도 보았다.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외국음식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여러 나라 말의 왁자한 소음 속에, 자밀의 목소리도 섞여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웃고 떠드는 수많은 얼굴들 속에 자밀은 없었다. 점점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눈은 거리와 집들의 지붕과 가로수 나뭇가지를 하얗게 덮었다. 나는 나의 구석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진 속 안경원숭이를 생각하며 천천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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