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은의 풍수이야기 (21) 울산 김씨의 발복지로 여흥민씨(麗興閔氏) 묘

▲ 양동주 대구한의대 대학원 겸임교수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명정리에 위치한 울산김씨의 중시조비(中始祖中) 여흥민씨(麗興閔氏)의 묘소는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물론, 풍수지리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복부혈의 명당 터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여흥민씨(1350-1421)는 아호(雅號)가 하소부인(荷沼夫人)으로 한성판윤 량(亮)의 따님이며 태종비 원경왕후 민비와 사촌이다. 그녀는 울산김씨 시조 김덕지(金德摯:신라 경순왕의 둘째왕자)의 17세손인 김온(金穩)과 혼인하여 달근, 달원, 달지 3형제를 두었는데 둘째아들인 달원의 현손이 바로 신라, 고려, 조선조에 걸쳐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에 배향된 18명의 인물 중 한명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1510-1560)이다. 이들 해동18현 중 호남출신은 유일하게 하서선생뿐으로 바로 장성 출신이다. 오늘날 장성사람들이 하서 선생을 배출했기 때문에 선비의 고장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남편 김온(1348-1413)은 고려 우왕 때 등과하여 이성계의 요동정벌과 조선개국에 참여하였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태조원년에는 회군원종공신(回軍原從功臣)에 책록되고 밀양부사를 거쳐 양주목사를 지냈으며 정종2년에는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어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 호는 학천(鶴川)으로 학천군 또는 흥려군(興麗君)으로 불리며 현재 울산김씨의 중시조로 삼고 있는 인물이다.

울산김씨 문중에서는 울산김씨가 하서선생 및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하서선생을 배출한 장성뿐 아니라 호남의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하서선생의 5대조 할머니인 하소부인이 영세흥왕(永世興旺)의 터에 묻힌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 터를 하소부인 자신이 직접 신후지지로 잡았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이 터에 묻어줄 것을 유언하며 "내가 이 터에 묻히면 말을 탄 자손이 밀등에 가득할 것이며 현인이 나면 필시 필암은 서원 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하서선생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울산김씨는 명문가가 되었고 필암서원이 세워졌으니 그녀의 예언은 무섭도록 적중한 셈이다. 그녀가 이처럼 정확한 예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풍수지리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의 해박한 풍수지식은 한양의 궁성 터를 잡고 축조에 참여한 무학대사가 업무상 자주 한성판윤댁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무학대사로부터 풍수지리서나 교육 등을 통하여 풍수이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풍수이론을 정립한 '하소결(荷沼訣)'은 울산김씨의 문화유산으로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또한 울산김씨가 장성에 세거하게 된 것도 하소부인이 황룡면 맥동에 처음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한양에서 살던 하소부인이 이곳 장성까지 와서 정착하게 된 연유는 태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외척을 배척할 때 사촌오빠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옥사에 양주목사로 재직하던 남편이 함께 연루되어 사약을 받는 화를 입게 되자 멸문지화를 피하려 세 아들을 데리고 南으로 南으로 내려오다 보니 이곳 장성까지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장성의 여러 곳 중 하필 맥동에다 삶터를 정한 것은 어느 산마루에서 나무로 깎아 만든 매(罵)를 날렸더니 내려앉은 곳이 바로 맥동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울산김씨 문중자료 참고)

▲ 정부인 여흥 민씨 묘.


여흥민씨묘를 찾는 길은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I.C에서 내려 15번 국도를 타고 고창 쪽으로 1km정도 가면 도로가에는 여흥민씨묘를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여기서 표지석이 가리키는 농로를 따라 명정마을로 들어서면 마을 끝에는 명정재(鳴鼎齋)라는 재실이다. 이 재실 옆 좌측 봉우리에 여흥민씨의 묘소가 터 잡고 있다.

재실 앞에는 잘 가꾼 공원도 이만할까 싶을 정도로 정성을 다해 손 본 정원이다. 정원 복판에는 "말을 탄 자손이 밀등에 가득하리라"라는 여흥민씨의 예언을 커다란 자연석에 새겨 놓았다. 그 앞에는 샘물이 솟아 이룬 작은 연못이다. 진응수(眞應水)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주위를 살피니 재실의 청룡 봉우리에는 여흥민씨의 묘로 보이는 한 묘가 나무사이로 봉분의 윗부분만 살짝 보여준다. 진응수임에 틀림없다. 진응수(용의 생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용맥 좌우에서 따라오는 수기(水氣)가 입수도두 뒤에서 분수(分水)하여 혈장 옆과 아래를 감싸 혈의 생기를 보호하고 기운이 남아 지상으로 분출하는 물이다) 진결대지(眞結大地)의 증거라고 하며 필시 대부귀현(大富貴顯)이 기약된다는 길수(吉水)라고 할 수 있다.

그 앞에는 두 마리의 돌거북 위에 이곳 묘역 정화사업내력 등을 적은 두개의 비석을 세웠다. 그런데 그 거북 한 마리는 머리가 정확히 봉분을 향하는데 다른 한 마리는 꼬리가 정확히 봉분을 향하고 있다. 다산과 장수, 풍요를 상징하는 거북은 알을 낳으러 뭍으로 나온다고 하니 머리가 봉분을 향한 거북은 물에서 뭍으로 나오는 거북을 뜻하고, 꼬리가 봉분을 향한 거북은 알을 다 낳은 거북이 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뭍으로 나오는 거북의 꼬리방향과 물로 다시 돌아가는 머리방향은 분명 어느 한 곳 즉 물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거북이 나오고 돌아갈 강이나 호수 등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거북이 나오고 돌아가는 그 장소는 어디일까? 묘가 있는 봉우리에 올라가서야 그 궁금증은 바로 풀렸는데 그 장소는 바로 달성저수지다. 석물 하나의 설치에도 '이 곳이 울산김씨 영세흥왕의 터'라는 상징성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거북을 선택하였고 거북의 생태까지 반영하여 배치하였다. 후손들이 이 곳 묘역에 바치는 정성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 묘지 입구에 세워진 예언비.


재실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봉분의 윗부분만 살짝 보이던 산봉우리에 오르면, 봉우리 전체가 거대한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 같은 호남정맥의 정기(精氣)를 고스란히 담아 氣 덩어리로 뭉쳐진 여흥민씨묘의 큰 혈장이다. 여흥민씨 묘는 엎어놓은 솥 밑바닥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봉분 앞 우측에는 정부인여흥민씨지묘(貞夫人麗興閔氏之墓)라고 쓴 비석을 세워 놓아 이 묘의 주인공이 여흥민씨 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묘 좌측에는 남편 김온의 단(壇)이다.

여흥민씨묘는 혈의 사상을 기준으로 볼 때 돌혈(突穴)이다. 돌혈은 태조산에서 출발한 용맥이 중조산, 소조산을 거쳐 훌륭한 혈을 맺기 위해서는 혈장 뒤에서 반드시 결인속기(結咽束氣)를 해야 하는데, 결인속기처가 혈처보다 현저히 낮아졌다가 비룡(飛龍)하여 돌기한 곳에 혈을 결지하여야 한다.

이곳 묘소의 결인속기처(結咽束氣處)를 보면 엄청나게 낮아지면서 결인속기하여 비룡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혈은 결인속기처의 역량에 따라 진혈(眞穴)과 가혈(假穴)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하는데 이곳은 그 표본에 해당한다고 할 만하다. 또한 돌혈(突穴)을 복부혈(覆釜穴)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혈장이 마치 솥을 엎어놓은 것 같은 형상이라고 하여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돌혈의 혈장에는 반드시 솥의 받침대에 해당하는 현침사(止角)가 있어야 진혈을 결지한다고 본다. 그리고 혈처는 '금낭경'에서 형여복부 기전가부(形如覆釜 其其可富)라 하여 복부혈의 경우 그 기가 집중되는 위치는 정상이라 했고, 정상에 혈처를 취해야만 큰 부자가 나오고 융성하다고 하였다. 이곳을 살펴보면 묘소를 중심으로 좌측 뒤와 좌측 앞, 우측 앞 이렇게 세 곳에 각각 현침사가 있고, 솥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정상에 자리하고 있으니 여흥민씨묘는 진혈이며 정혈처에 자리한 것이 분명하다.

▲ 결인처에서 본 민씨 묘.


청룡과 백호는 주산에서 뻗어 나온 본신룡에서 나온 것으로 이곳 혈을 환포해주나 혈 앞까지 완전하게 감싸주지는 못했다. 안산 또한 조금 멀고 어느 것인지가 뚜렷하지 않다. 굳이 이곳의 흠을 잡자면 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곳은 생기의 설기가 비교적 적은 회룡고조(回龍顧祖)인데다 외청룡, 외백호, 안대(案帶)가 끊어짐 없이 하나로 둥글게 이어져 혈을 넓게 감싸주고 있어 조그만 흠을 충분히 보완해 주고 있다. 외청룡은 방문산, 방장산의 연이어 온 맥이고 외백호는 백암산의 역시 연이은 맥인데 모두가 조종산(祖宗山)인 입암산의 연맥과 이어져 있다. 물은 좌측에서 발원하여 우측으로 감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나가는데 이 곳 내당의 물뿐 아니라 외당을 이루며 둘러쳐진 연봉들의 여러 골짜기에서 나온 물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 달성저수지를 만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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