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망각의 연속 나를 버리면서 나를 채우는 자신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내가 졸업한 시골 초등학교를 찾았다. 고향에 왔지만 부모가 떠나고 없는 빈집 같아 망연자실 서 있었다. 그래도 무언가 내가 거기 있었던 의미를 찾으려 안달이 났다. 맨드라미를 가꾸었던 화단, 동글동글한 열매가 떨어지던 늙은 플라타너스 나무. 쇠 종이 걸려 있었던 지붕의 처마 끝자락. 계란 귀신이 나온다 했던 목조 화장실의 삐걱대던 문…. 이런 자리들은 이미 다 허물어져, 흔적조차 없다. 더듬어볼 기억의 단서마저 흐물흐물.

그렇게 컸던 건물, 넓었던 운동장…. 이제 왜 그리도 왜소해졌는지. 나의 시간과 공간은 대부분 맥락을 잃고 도망쳤다. 그 부재의 자리를 짚어내려 사진첩을 뒤적여 본다. 거기엔 동창들도, 풍경도, 건물도 건재하다. 심지어는 날아가는 새들도 갓 피어난 꽃들도, 한 시대의 이념과 구호도 '차렷 혹은 열중 쉬어!' 자세로 정지돼 있다. 용케 나는 사진으로나마 나의 껍데기를 박제해 두었으니 다행이다. 나의 허물은 일단 거기 묶였다. 입었던 옷을 여기저기 벗어던지고 욕탕에 풍덩 뛰어들 듯, 나는 현재로 또 현재로 허물을 뒤로 하고 열심히 도망쳐 왔다. 흑백 사진 속으로 열고 들어가는 문은 역시 기억력이다. 비밀번호 또한 기억이다. 제정신이 아니라면 말짱 도로 묵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허무를 견디는 눈물겨운 몸짓 아닌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걸음걸이이다. 누구도 대행할 수 없는 숨 가쁨이자 언어이다. 희망이란 비관하지 않는 연습이다. 표정을 웃음 모드로 고정시키고, 마음을 가라앉지 않게 추켜세우는 기법이다. 현금 카드를 긁고 찌익- 대충 긋는 사인으로 면면 이어온 것이 내 희망의 전부가 아니던가. 그러니 다른 데를 보지 마라. 열심히 자신을 보자. 지금의 나로서 내가 바라던 것들이 현전(現前)해 있다. 그게 전부이리라. 남, 바깥은 환영이다. 빈 깡통이고, 깨진 유리조각이다.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기능들은 실제로 대부분 고장 나 있다. 한번 제대로 나의 거울을 쳐다보지 않았기에 나라는 거울은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고작 남에게 나를 인정받는, 그래서 으쓱대는 썰렁한 일들의 연속이다.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자신을 닦달하고 무시하고 학대한다. 내가 존재하는 근거가 결국 남이라니. 그것마저 끝내 픽션이고 뻥이라니. 처량하나 그게 현실이다. 내 평생 피눈물 나게 공을 몰고 가서 차봤자 자살골이라니 억울하지 않나. 일찌감치 자신에게 눈 돌리고 나를 사랑하며 따사롭게 돌볼 일이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훈련에 충실하자.

우리는 늘 자신을 잃어버리며 산다. 산다는 것은 망각의 연속이다. 그러나 잃어버림은 또 다른 새로움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순간순간 나는 나를 잃어버리며 새로운 나를 받아들인다. 지독하게 나를 버리며, 그 자리에, 다시 나를 채워간다. 잃어버린 나의 시간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을 응시한 눈을 감지 않는 일이다. 지상엔 영원이란 것이 없다. 순간순간 그 그림자를 좇으며 나는 살아간다. 거기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희망 찾는 법을 배우고, 내일을 꿈꾸는 연습을 한다. 모든 제도와 형식은 은유이지만 '그런 척' '있는 척'하면서 길을 가리킨다. 헛걸음을 해서라도 자신 속으로 뚜벅 뚜벅 걸어 들어가라 한다. 잃어버린 시간은 그렇게 나를 버리면서 다시 나를 채워 담는 형식이다. 한 해를 보내는 그 자리가 바로 새해를 맞는 자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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