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경으로 복을 짓다…나눔·배려 교육 대물림

▲ 눈 덮힌 퇴계 종택.

경북은 종가(宗家)의 본산이다. 전국 성씨의 35%가량 되는 240여 개나 된다.

'종(宗)'은 근원이요, 뿌리로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다. 이 때문에 경북에는 선대의 전통이 잘 이어지고 있다.

흔히 전통을 얘기하면 고리타분 한 것쯤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오늘을 사는 지혜가 담겨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경북일보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 지역의 종가를 찾아 '경북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오늘을 반성하며, 미래를 열어가는 자양으로 삼으려 한다.

경북일보는 '종가'의 연재로 올해 새 터전에서 신청사를 열어 새로운 1000년을 계획하는 경북의 올곧은 정신세계를 탐험해 새로운 시대철학을 세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종가문화를 보유한 곳이 경북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종가고택만도 120여 개소에 이른다. 이들 중 명망 있는 대표적 종가가 진성 이씨 퇴계 이황(1501~1570) 종가다.

퇴계종가는 '영남의 큰집'이라 불릴 만큼 퇴계 선생의 정신의 원천이 대대로 흐르는 집안이다.

종가의 가훈과 예법, 나눔과 배려의 가풍은 종손에서 종손으로 대(代)물림 된다.

종가에서는 해마다 퇴계 선생의 '불천위(不遷位)'제사가 봉행된다. '옮기지 않는 신위'란 뜻의 불천위는 도덕성 및 학문이 높아 4대가 지나도 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에 두면서 올리는 제사이다.

전국에 불천위는 279위가 있으며 이 가운데 경북지역에만 절반이 넘는 152위가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청렴하고 백성을 보듬고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는 공통점이 있다.

▲ 이근필 종손

△퇴계태실·퇴계종택·퇴계묘소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는 퇴계가 태어난 '퇴계태실'이 있다. 조부인 계양공(繼陽公)이 1454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호를 따 노송정(老松停)이라 이름지었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성인이 임한다'라는 뜻의 성림문이다. 퇴계의 어머니 춘천박씨가 퇴계를 가졌을 때 공자가 문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태실에서 온계천을 따라 내려가다 35번 국도를 건너 토계천을 계속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퇴계종택이 나온다.

퇴계종택은 1715년 도산서원 원장으로 온 봉화 닭실마을 사람 창설재 권두경이 창건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의 방화로 불탔다. 이후 1926년 전국의 450여 문중이 성금을 내어 2년여 만에 지금의 자리에 복원했다.

퇴계 선생의 묘소는 단아한 모습이다. 1570년 임종을 앞둔 선생은 "내가 죽으면 반드시 조정에서 베푸는 예장을 사양하라. 비석을 세우지 말고 작은 돌의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만 새기라"고 유언했다.

퇴계 스스로 묘비명을 쓴 것은 제자나 다른 사람이 쓸 경우 실상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장황하게 쓰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퇴계의 가르침과 교육관

퇴계 이황은 율곡과 함께 조선 유학의 두 거봉(巨峰)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이 펴낸 퇴계학파의 학맥도에 따르면 퇴계 당대에 310명을 비롯해 오늘날까지 715명에 달하는 학자들이 퇴계학파(영남학파)를 형성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흔히 그를 조선 최고의 유학자로만 알고 있지만, 제자와 자녀교육에서 커다란 획을 그은 교육자이기도하다.

'학문은 생활의 실천'이라는 퇴계의 가르침은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안동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의 계보를 추적해 보면 대부분 퇴계의 제자인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로 이어진다고 한다. 바로 '배운 것을 실천한다'는 퇴계의 정신이 이어진 것이다. 이육사도 퇴계의 14대 후손이다.

퇴계 종손들은 서너 살이 지나면 할아버지 방으로 옮겨야 했다. 조상의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들으며 종손으로서의 행동거지와 마음가짐을 배우기 위해서다. 요즘은 보기 드문 가풍이다.

▲ 사랑채 추월한수정.

△종손들 이야기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퇴계종택을 지키고 있는 16대 이근필(83) 종손은 선대의 뜻에 따라 평생 교육에 몸담았다. 경북대 사범대를 졸업한 종손은 인천 제물포고에서 3년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고향인 도산초등학교에서 새로이 교편을 잡아 교장으로 퇴임했다.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퇴계종택에 안방마님인 종부의 빈 자리는 컸다. 15대 종손 이동은(2009년 타계)의 부인 김태남 여사가 2000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어머니보다 7년 먼저 세상을 등졌다. 한때 종택에는 3대에 걸쳐 종손만 남게 됐다. 마침 17대 종손 치억 씨가 2006년 결혼, 다음해 18대손 이석(8)군을 보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치억씨는 지난 2013년 성균관대에서 '퇴계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퇴계의 학문을 10여 년간 불철주야 공부한 성과다. 그는 "유교를 깊이 공부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치억씨의 고모부는 전 삼보컴퓨터 창업주 이용태(82) 회장이다. 그는 지금 '경(敬)'의 실천을 강조한 퇴계 선생의 뜻에 따라 박약회(博約會)를 이끌고 있다. 유림단체인 박약회는 우리나라에서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10년 동안 꾸준하게 실천운동을 펼쳐오고 있다. 삼보 부회장과 두루넷 사장을 지낸 김종길(73) 사장도 치억씨의 고모부다. 현재 도산서원선비수련원 원장이다.

▲ 15대 종손 이동은이 쓴 성학십도.

△종택에서 만난 이근필 종손

종택에서 만난 이근필 종손은 먼저 수제봉투를 내민다. 그는 청력 손실로 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

"저는 폐인(閉人)입니다. 80평생 객지 3년을 제외하고는 고향에서 줄곧 살았어요. 한가지 조상에게 제일 부끄러운 것은 건강을 지키지 못한 거예요. 아직 손주들이 어린데"

종손은 손주들이 아직 어린게 제일 맘에 걸리는 듯 했다.

답답한 심정에 시작한 것이 '봉투지 광고'였다. 봉투지 앞면에는 '수제광고, 민들레 처럼'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봉투가 전하는 메시지가 민들레의 홀씨처럼 날아 세상에 퍼지기를 바라는 바람이 담겨 있다. 제목 아래에는 부친이 남긴 '도덕구국(道德救國), 심성도정(心性導正), 예지낙지(譽之樂之), 적수성천(滴水成川)'이라는 문구가 와 닿는다.

그는 최근 '백만인 애국심 릴레이'를 펼치고 있다. 도덕성 회복운동이다. 작은 책자에 마음에 와 닿는 칼럼을 모아 공유하자는 취지다. 도산서원선비수련원을 찾는 수련생에게도 전해준다. 책 뒷면엔 '예인조복(譽人造福)', '사해춘택(四海春澤)'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종손은 최근 자신이 죽으면 화장할 것을 요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후손이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는 일인 만큼 후세에도 계속돼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인데 이것이 복잡한 격식 때문에 귀찮은 일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까워서 그런 결심을 하게 됐다"고 했다.

▲ 퇴계 선생 묘.

평생 지극정성으로 웃어른을 섬기며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해 왔지만 자신은 그것을 되받기를 고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경(敬)의 마음이 가슴을 울린다

마지막으로 이근필 종손은 직접 쓴 '의재정아(義在正我)'를 건낸다. '의(義)는 나를 바르게 하는 데 있다'라는 뜻이다.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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