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춰둔 절경 그 위를 흐르는 '선비의 향기'

▲ 용계천에 그림자를 드리운 용계정의 겨울 풍경이 한가롭다.
비스듬히 길게 누워 멀리 향기를 내뿜는 향나무, 지난 여름 색종이 처럼 꽃잎을 날리며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백일홍, 조선 중기의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택과 맑은 물이 흐르는 기암위에 우뚝 선 정자.

용계정의 풍광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시절은 칼바람 팽팽 부는 세한의 겨울이다. 겨울은 한 때의 영화를 추억하는 쓸쓸함, 돌아올 봄날에 대한 기다림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모든 현재는 겨울 아래 엎드렸다.

포항시 북구 기북면 덕동마을은 풍광이 뛰어난 명승이다. 마을 전체가 민속촌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의당 이강이 이곳에 들어온 후 360여년 동안 여강 이씨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애은당 고택, 사우정, 여연당고택, 용계정, 덕계서당 같은 조선시대 고택과 고건축물을 보존하고 있다.

또 1930년 사설학당터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근대 한옥, 70년대 슬레이트 지붕까지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400년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용계정은 덕동마을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덕동숲과 함께 2011년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됐다.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둔'(사의당 초건 상량문) 절경지에 우뚝 서 있는 선비의 향기다.

여강 이씨 입향조인 이강이 1686년 건축을 시작해 손자인 이시중이 마무리한 이 정자는 자금산에서 흘러나온 용계천 기암절벽 위에 서서 수려한 풍광의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정자 난간에서 내다보면 '덕연구곡'과 '삼기', '8경'이 용계정으로 빨려 들어왔다가 다시 퍼져나와 제자리를 잡은 것 처럼 보인다. 정자는 이 마을 모든 풍광의 설계자이며 통치권자이다.

정자 입구에는 400년 가까이 된 은행나무와 그만큼 나이를 먹은 누운 향나무 '층대와향'이 눈길을 끈다. 정자 담벼락에 붙어 서있는 백일홍나무도 만만치 않은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키가 큰 백일홍이 꽃을 활짝 피우는 7월과 8월의 용계정은 바로 옆에 있는 덕동숲과 장관을 이루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덕동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은 '덕연구곡' 과 '삼기', '8경'으로 설명이 다 된다. 구곡과 삼기는 용계정과 덕동숲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으므로 산책로를 따라 '숨은 그림'을 찾는 재미도 솔솔하다.

덕연구곡은 덕동을 중심으로 경영됐으나 누가 설정했는지 경영했는지 확실치 않다. 1곡은 수통연으로 물이 흐르는 연못, 2곡은 막애대다. 속세를 멀리한 너른 바위라는 뜻인데 지금은 큰길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다리가 들어서 속세를 멀리해 지은 이름이 무색해졌다. 3곡은 서천폭포, 4곡은 섬처럼 형성된 소나무 군락지로 도송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 숲을 보존하기 위해 소나무 그루그루 마다 관리자 이름을 붙여 숲을 보호하고 있다. 용계정과 이어진 연못의 이름이 호산지당인데 호산지당 산책로에 있는 소나무숲이 그곳이다.

5곡이 연어대(鳶魚臺)인데 용계정 앞에 내려다 보이는 기암이다. 용계정 난간에서 보면 바위 위에 새긴 '연어대'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용계천 물길이 바위 앞에서 가파르게 굽이치면서 소란스러워 지는데 그 곳에 서 있는 바위에 붙인 이름이다.

'어약연비'에서 따온 이름이다. 물고기는 뛰놀고 솔개는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자연의 순행에 따라 제자리를 잡아 평안한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시경'에 나오는 말이다.

6곡은 호산지당 연못과 용계정 사이 계곡물이 합쳐지는 곳 '합류대'로 바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7곡은 구름이 피어오르는 연못이라는 뜻의 '운등연', 8곡은 용이 누워있는 형상의 '와룡암'이다. 9곡은 가래같이 생긴 긴 연못이라고 해서 '삽곡'이라고 한다.

세가지 기이한 경치 '삼기'는 암석사이로 샘물이 솟아오르는 '석간용천'과 용계정 입구에 있는 누운 향나무 '층대와향', 용계정 후원 소나무 '후원반송'이다.

이밖에 8경은 마을을 둘러싼 산과 봉우리의 풍경인 '자금산간운', '응봉낙조' 등이다.

용계정의 본래 이름은 '사의당(四宜堂)'이다. 이 마을 이강이 자신의 호를 정자 이름으로 붙였다. '사의'는 사계절 따라 각각 적합하고 마땅한 일이라는 뜻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인데 가구는 5량고주의 겹처마집이다. 좌우에 각각 방이 있고 방 위에는 다락이 지붕과 이어져 있으며 마루 끝에는 난간을 달았다. 난간 아래에는 계곡이 펼쳐지고 계곡 건너편에는 기암이 늘어서 있다.

사의당을 용계정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확실치 않다. 용계천의 이름을 땄는데 현판은 지족당 최석신의 글씨이다. 정자 안쪽에 걸린 '연연루(淵淵褸)' 현판은 '우리 가문의 학문의 연원'이라는 뜻이다. 이조판서를 지낸 조윤형이 현판을 썼는데 원판은 덕동민속전시관에 소장돼 있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용계정 입구에 있는 '세덕사' 푯말은 입향조가 세운 용계정을 살리기 위해 당시 마을사람들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정조이후 용계정은 세덕사의 강당으로 사용됐는데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서원과 함께 철폐될 위기에 처했다.

마을 사람들은 세덕사와 용계정을 분리시키기 위해 밤새도록 담장을 쳤고 다행히 세덕사만 철폐되고 용계정은 남았다. 살아남은 용계정은 그 아름다운 건축양식과 경관으로 '명승'으로 지정됐다.

세덕사 현판은 조선시대 화가로 이름을 날린 강세황이 썼는데 현재 덕동민속전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농포 정문부 선생이 살았던 ‘애은당 고택’- 조선 중기 건축기법 고스란히

마을입구 용계정과 마주보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0호.

조선시대 북평사 전주부윤 전주진병마절제사를 지낸 바 있고 임진왜란 당시 많은 공을 세운 농포 정문부 선생이 살았던 집이다.

선생은 식솔들의 피난처로 사용하다가 임진왜란 후 고향인 전주로 이사하면서 그의 사위인 사의당 이강에게 재산 일체와 함께 양여했다.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0호 애은당 고택.
안채, 사랑채, 별당채, 방앗간채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후대에 중수되거나 해서 당초의 모습은 보기 드물게 됐고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기법이 누견(累見)된다.

안방과 건넌방 앞에 쪽마루가 있는데 대청은 이 쪽마루 까지의 넓이로 구조되긴 했으나 1칸 넓이어서 아주 촉박해 보인다.

사랑채는 중문 좌측에 2칸 사랑방, 다음이 1칸의 대청이다. 별당는 쪽마루도 없이 방 둘이 나란하고 방앗간은 2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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