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發巖崖春寂寂 (화발암애춘적적-꽃이 가파른 벼랑에 피어 봄은 고요하고)
鳥鳴澗樹水潺潺 (조명간수수잔잔-새가 시내 숲에 울어 시냇물은 졸졸 흘러가네)
偶從山後攜童冠 (우종산후휴동관-우연히 산 뒤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閑到山前問考槃 (한도산전문고반-한가히 산 앞에 와 머물 곳을 묻는다)


<해설> 이 시는 퇴계가 제자들을 데리고 계상에서부터 걸어서 산을 넘어 서당에 도착한 느낌을 읊은 것으로 성리학상 수양(修養)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는 시라고 한다. 꽃이 피고 새가 울며 물이 흘러가는 게 자연의 이치다. 이 속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한가로이 산 앞에 이른 것은 천리(天理)에 순응하여 자연과의 혼연일체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 김진태 전 검찰총장

퇴계 이황의 시 '보자계상유산지서당(步自溪上踰山至書堂)'이다.

퇴계는 율곡 이이와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퇴계는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학식이 뛰어났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귑게 나아가지 않았으며 경서를 탐구하고 도를 즐기는 것을 일로 삼았다.…퇴계는 이 세상의 유종(儒宗)으로서 조광조이후 그와 겨룰 자가 없으니, 이황이 재주와 기국(器局)에 있어서는 조광조에 미치지 못하지만 의리를 깊이 파고들어 정미한 경지까지 이른 것은 조광조가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로 기술돼 있다.

퇴계는 문과 급제후 단양군수, 성균관 대사성, 동지중추부사,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 수많은 요직을 두루 역임했지만 늘 사퇴를 청해 머무는 기간이 짧았다. "퇴계는 과거로 출신하였음에도 완전히 나아가지도 아니하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아니한 채 서성이면서 세상을 기롱했다"는 정인홍의 비판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생후 1년만에 부친이 별세하고 처가 연이어 사망하고 자식들이 요절하는 등 지극히 불행한 가정사가 쉽없이 이어졌지만 며느리를 몰래 개가시키는 등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그 또한 인간적이었다.

그는 성리학의 최고봉에 이르러 종주(宗主)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그가 성리학의 성립에 큰 영향을 준 불교의 배척을 건의하거나 老莊을 폄하하는 등 사상의 편협성을 보인 것에 대하여는 이해가 쉽지 아니하다.

묘한 것은 퇴계와 학풍은 다르지만 그에 못지않은 남명(南冥) 또한 그와 같은 해인 음력 1501년에, 그것도 같은 경상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퇴계는 영남 좌도를, 남명은 영남 우도를 대표했다.

남명이 진주지방을 중심으로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실천적인 학문을 주장했다면, 퇴계는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성리학을 이론화 했다. 남명은 '의(義)', 퇴계는 '인(仁)'을 주창하면서 오랜 세월 면면히 이어져 학파를 형성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사람 생존 당시부터 예견되었으니, 퇴계는 남명을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 남명은 퇴계를 "물뿌리고 청소하는 것도 제대로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논하면서 허명(虛名)을 훔친다"고 서로 비판하면서 상이한 학문관과 세계관을 노정했다.

이는 선비 사회가 동서(東西)로 분화되자 일단 이들 제자들은 모두 동인(東人)의 핵심이 되었지만 곧바로 퇴계제자들은 남인(南人), 남명제자들은 북인(北人)이 되어 당쟁을 격화시겼다는 비판에도 자유스럽지 못하다.

심지어 오늘날에 있어서도 좌도 쪽의 이문열, 김주영, 이인화 등과 우도쪽의 이병주, 박경리 등의 문학을 통하여 현실을 보는 눈에도 차이가 보인다고 한다면 나만의 억측(臆測)일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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