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지혜와 덕 받들며 초야의 삶을 살다

충의와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 양성과 조상들의 덕과 정신을 받들며 초야의 삶을 선택한 야성 정씨(野城 鄭氏) 참판공 종가 (參判公 宗家).

영양읍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4㎞ 정도 가다가 918번 지방도로를 거슬러 2.4㎞로 더 가면 일월면 가곡리가 나온다.

인근 주곡, 도곡 마을과 함께 가마솥 형국을 취하고 있어 부곡(釜谷) 혹은 삼부곡(三釜谷)으로 불리는 이 마을에는 야성 정씨와 한양 조씨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참판공 정담(鄭湛·1548~1592)의 종택은 마을 중앙인 가곡리에 위치하고 있다.

야성 정씨는 영덕 김씨와 더불어 영덕을 대표하는 토성으로 울진 평해 기성면 사동에 거주했으나 조선 선조 임진왜란에서 전라도 전주성을 지키기 위해 웅치전투에서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한 참판공 정담이 영해 인량리로 옮긴 후 1810년 정담의 9대손 정치묵(1781~1815)이 현재 일월면 가곡리로 입향해 자리를 잡았다.

1846년 지금의 위치에 정면 4칸 측면 5칸의 'ㅁ'자형 가옥으로 지어, 사랑채에는 종손의 고조부 정덕현(1840~1896)이 쓴 '매포정사(梅圃精舍)'와 증조부 정윤영(1868~1938)의 당호인 '괴음당(槐陰堂)'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원래 사당 앞 에 1876년 건립한 사랑대청이 있었으나 1903년 화재로 소실됐으며, 현재 종가에는 30대 종손 정재홍(77)과 종부 권혜랑(79) 부부가 지키고 있다.

▲ 일월면 가곡리에 위치한 야성 정씨 참판공종가.

△참판공 종가의 유래와 가훈

참판공 종가에서 불천위로 모시고 있는 정담은 1592년 청주 목사로 부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김제 군수로 웅치전투서 '차라리 목숨을 잃을지언정 구차하게 삶을 구하기 위해 물러서지 않겠다.'면서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해 전투는 패했지만 전주성을 지킬 수 있는 공을 인정 받아 선무원종삼등공신으로 책록 되었으며, 순조 시절 장렬공(壯烈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지금도 음력 7월 7일이면 종가 옆 1863년 건립돼 참판공 정담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장렬공 사당(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77호)에 집안 후손들이 모여 제를 올린다.

종가의 가훈은 '조상을 잘 받들고 자손을 중히 여겨라'며 충신 정담의 후손들답게 조상의 덕과 정신을 잘 받들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아 왔으며, 대대로 손이 귀한 집안으로 귀한 집 자식일수록 천하게 키워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에 자손들이 아무 탈 없이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돌잔치나 생일잔치를 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가 어리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는 귀담아 들어주며, 나이와 상관없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자손을 중히 여기는 교육방식이라 여기고 있다.

△종가의 유산과 문화재

종가 옆에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77호인 불천위 참판공 정담의 신주가 모셔진 정면 3칸과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장렬공 사당이 있다. 명고서당은 야성 종씨 참판공 종가는 1710년 정담의 후손들이 영해 인량리에 향현사(鄕賢祠)를 세우고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했다.

이후 후손들이 일월면 가곡리로 이주하면서 현제 위치인 도곡리에 옮겨 세워 1828년 서원으로 승격시켜 정담의 위패와 문월당 오극성(1559~1616)의 위패도 배향했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380호인 임진왜란 당시 웅치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치다가 전사한 정담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690년에 영덕군 창수면 인향리에 정담 정려비(旌閭碑)가 있으며, 당초에는 목비였으나 훼손이 심해 1782년 석비로 다시 건립했다.

▲ 참판공 정담 선생이 임진왜란 중에 남긴 글을 설명하는 참판공 종가 30대 종손 정재홍.

△종손과 종부의 삶

30대 정재홍 종손은 정영발(1919~1983)과 신안주(1916~2012)사이에 3형제 증 맏이로 태어나 유년시절부터 가난한 종가의 종손으로 한 집안의 가장으로 형제들을 출가 시키고 지금의 종가를 일으켜 세웠다.

영양에서 태어나고 자라 지금까지 종가를 지키면서 조상을 받드는 일을 천직으로 종손으로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한빈한 촌사람'이라고 스스로 낮춰 부르지만 종손은 어린 시절부터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하게 살더라도 교육을 받지 않으면 금수와 다를 바 없다"는 조부 정인직(1889~1954)의 가르침에 따라 '계몽편', '동몽선습', '명심보감', '대학' 등 한학을 모두 익혀 이 일대에서는 박학다식한 한학자로 꼽힌다.

44세 무렵 선친이 돌아가시고부터 문중의 대소사와 가족들을 책임지는 종손으로서 책임감은 늘 무거웠지만 가훈인 '조상을 잘 받들고 자손을 중히 여겨라'를 지키기 위해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그래서 선조의 묘소 정화작업, '충렬록'국역본 간행, 정려비 이건, 족보간행 등 조상 선양 사업에 평생을 바쳐 왔다.

종손으로서 가장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때가 언제였나는 질문에 종손은 지난해 7월 한국국학원에서 중국 유명 대학교수들을 초빙해 사당에서 불천위 제를 올릴 때 모습을 지켜본 중국 학자들이 종가의 문화와 불천위 제에 대한 질문을 쏟아질 때 종손으로서 자부심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 종부 권혜랑.
종손과 함께 55년째 종가를 함께 지키고 있는 권혜랑 종부는 24세 때 종손을 만나 혼인했으며, 안동 권씨 집안 6남매 맏이로 태어났으며, 고향인 영해 관어대에서 '꽃 잘 새기는 처자'로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자수 솜씨가 뛰어났다.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보리밥도 모르고 살았고 맏이가 아니기에 제사를 지내본 적도 없어 종가가 무엇인지 종부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가난한 종가의 종부로 시집와서 그야말로 막막함의 연속이었다.

시부모님과 2명의 시동생에 특히 1년에 14차례나 이르는 조상 제사는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다행히 친정에서 바느질과 음식을 제대로 배워온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종부로서 역할을 다 할 수 있었다.

또 종부로서 참판공 종가에서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들을 중시 내리는 집안 내력에 따라 접빈과 내림 음식을 중히 여겼다. 제사를 지낼 때마다 사용하는 제주인 '십오일주'를 항상 직접 담갔으며, 제사상에 차려지는 유과와 약과, 다식, 감주, 점주 등을 직접 만들어 손님들과 집안 친지들을 접대했다.

종부는 "종가로 시집와서 법도도 엄격하고, 생활은 궁색한데다 제사는 많아 어려움이 많았다"며 "전통문화를 지켜나가는 것은 비록 힘들지만,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종부의 삶에는 항상 만족한다"면서 자부심을 내 비쳤다.

이런 종부와 함께 55여 년을 함께한 종손은 "가난한 종가에 종부로서 지금까지 싫거나 힘들다는 내색 한번 없이 종가를 지키고 번듯하게 살림과 자손을 번창 시키고 함께 종부로서 자부심 하나로 종가를 지켜온 집사람에게 정말 고맙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어느 종가나 다 비슷하겠지만 슬하에 3형제를 두고 있고 지금은 장성해 큰 자식은 미국에 살고 둘째와 셋째는 직장 때문에 자신의 대가 끝나면 더 이상 종가를 물려받을 종손도 자식도 없는 게 종손으로서 조상들께 송구스럽다"며 "이제 집사람도 나이도 많고 기력도 쇠퇴해 점점 종부로서 역할에 힘이 부쳐 종가 대대로 내려오는 점주 등 전통음식을 더 이상 물려받을 자손들이 없어 더욱더 아쉽다"고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다.

▲ 불천위 참판공 정담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장렬공 사당.



정형기 기자
정형기 기자 jeonghk@kyongbuk.com

경북교육청, 안동지역 대학·병원, 경북도 산하기관, 영양군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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