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빚은 술잔이 바위에 주렁주렁

▲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작괘천에 위치한 작천정, 주변 산과 계곡, 바위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장맛비가 지루한데
산의 풍광은 창호에 들어와 옷깃에 가득하네
신선을 찾아 어찌 반드시 방외에서 노닐겠는가
하늘은 이 정자에 학과 거문고를 빌려주었네
- 작천정 내부 이호경의 현판시-

'영남 알프스'는 백두대간의 남동정맥을 연결하는 9개 산의 패키지다. 간월산과 가지산 신불산 문복산 천황산 제약산 등 9개의 산이 모두 해발 1천m를 넘어 제각기 나름의 비경과 산수를 자랑하는데 영남 알프스로 묶어 놓으니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하고 장대하다.

봄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억새가 등산객의 발길을 유혹한다. 그러나 알프스의 이름값을 하려면 역시 흰 모자를 덮어쓴 듯한 겨울의 설경이 압권이다. 그래야 알프스다.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작괘천(酌掛川)은 해발 1천68m 간월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언양을 관통하는 하천이다. 등억온천단지가 있는 등억리, 작천정이 있는 교동리를 지나 태화강으로 스며든다.

작괘천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인 옥산과 봉화산 협곡인데 계곡 바닥 자체가 하얀 반석이다. 이 너럭바위에는 자수정의 원료가 되는 형석이 들어있어 달 밝은 밤에는 바위가 반딧불처럼 불을 반짝 거린다고 한다.

▲ 작천정 현판시.

하얀 바위에 이곳저곳 움푹 파인 구덩이는 자수정이 빠져나간 자리다. 그 자리가 술잔을 걸어놓은 듯 하다고 해서 작괘천이다. 신선이 이곳에 내려와 술을 마시고 바위에 걸어놓은 술잔이라고도 한다.

간월산 홍류폭포에서 수만년 동안 흘러내린 옥수가 밀양 쪽으로 흐르면서 빚어낸 작품이 호박소이고 작괘천 하얀 바위를 지나면서 다듬어낸 작품이 작괘, 즉 술잔이다. 작괘천은 세월이 빚어낸 술잔이다.

1832년에 지은 '언양현읍지' 형승조는 작괘천을 "고을 남쪽 5리, 부로산 남쪽 기슭 아래에 있다. 취서산에서 발원한다. 몇 리에 걸쳐 반석이 한 가지 색으로 맑고 깨끗해 바라보면 마치 옥판자를 땅에 깔아 놓은 듯하다.

또 시내를 작괘천이라고 했다고 한다. 하류는 남천과 만나 울산 태화진으로 들어간다"라고 적었다.

오병선은 '작천정기'에서 "우리 고을의 작괘천은 옛날 항주의 서호와 같다. 시내에는 바위가 아름다워서 여러 대가들의 시문에서도 바위를 으뜸으로 여겼다. 그리고 잔질한다는 것으로 시내의 이름을 삼은 것은 신선이 마시던 술잔을 이곳에 걸어두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오병선의 기문 때문인지 감성적인 사람들은 옛어른의 흉내를 내 지금도 술잔 모양의 바위 웅덩이에 술을 통째로 붓고 술잔에 띄워 술을 마시며 희희낙락한다.

▲ 인근 바위에 세겨진 암서각.

작천정은 작괘천의 최고 절경지에 자리 잡았다. 포은 정몽주가 책을 읽었던 자리라고도 한다. 때문에 작천정 주변 작괘천 바위에는 송찬규의 '모은대기' 송종옥의 '모은대 추술'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모은'은 포은 정몽주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고종 31년 당시 언양현감 정긍조가 지금의 작천정 자리에서 시회를 열고 정자 짓기를 주청했고 울산군수가 1902년에 준공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칸인 팔작지붕 누각형 정자이다. 마룻바닥의 1/3은 축대 밖, 작괘천 쪽으로 튀어나왔는데 네 개의 기둥이 잘 떠받치고 있다.

정자에서 보면 작괘천은 참으로 눈부시다. 하얀 암반은 사포로 닦고 갈아놓은 것처럼 부드럽고 맑고 깨끗한 물줄기가 술잔 같은 바위를 채우기도 비켜가기도 하며 태화강으로 흘러든다.

뭇 시인 묵객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작천정과 작천정 주변 작괘천 바위는 '노천 한시 전시장'이다. 작천정 정자 내부에만 상량문 1편, 기문 5편, 시 18편이 있고 작괘천 바위에는 수없이 많은 시인 묵객이 절경을 노래하는 암서각을 남겼다.

작천정을 나와 바위에 발을 담그고 바위에 새겨진 시를 찾는 재미가 솔솔하다. 도처에 시와 이름이 새겨져 있으므로 보물찾기보다 훨씬 더 재미 있다. 꽝이 없는 뽑기처럼 신이 난다.

바위는 천년토록 조용한 뼈대이고
물결은 만고에 흐르는 물결이네
조용한 바위와 흐르는 물결이 느긋하지만
신기(神氣)를 찾은 길은 전혀 없네

-윤세용이 작괘천 바위에 새긴 시-

작천정의 풍광과 작괘천에서 술마시며 노는 재미는 역시 오병선의 시다.

“풍월을 읊조림에 한가한 날이 없는데 정자는 시 짓는 선비를 위한 다락이네. 이름을 쓴 바위는 이미 오래되었고/ 술잔을 가득 채운 물은 소용돌이치며 흐르네/ 사람은 별세계를 찾는데/ 산은 예 세월을 품고 있네/ 난간에 기대어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으니 / 소리마다 고국을 떠난 시름이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작천정은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사계절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울산 12경의 하나다.

간절곶 다음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봄에는 정자 옆 오래된 벚나무가 피워낸 벚꽃 놀이로, 여름에는 물놀이 장소로 인기가 높다.

작괘천을 세월이 만든 술잔이라고 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자연이 만든 '워터 슬라이드'다. 가을에는 황락의 단풍이 곱다. 겨울에는 눈부신 설경 정취가 매력이다.


■ 가볼만한 곳- 작천정 벚꽃 터널

울산 언양읍 신불산 입구에서 계곡에 이르는 1㎞구간에 있는 영남 제일의 벚꽃터널.

작은 오솔길 양옆으로 수령 150년 이상된 벚나무가 시립해 터널을 이룬다. 벚꽃 터널이 끝나는 지점에 작정천이 있다.

벚꽃 만개하는 봄이 가장 좋지만 가을에는 벚나무 낙엽이 연출하는 황락의 가을이 볼만하고 겨울에는 횡한 바람 속에 자리를 지키는 벚나무를 보면서 각자의 처지에 따라 인생무상을 느끼거나, 새봄을 기다리는 굳은 의지를 읽기도 한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바람길 양쪽에 시립해 대책없이 칼바람에 휘둘리는 벚나무는 그 나름대로 '세한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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