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역사의 대종가…'勿'자형 지세의 뜻 '깨끗함' 지켜와

▲ 중요민속문화재 제23호인 경주 손씨 종택 서백당.
경주시에서 포항 방면으로 20㎞쯤 떨어져 있는 양동마을은 지난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연간 20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 관광지가 됐다. 방문객들은 기와집과 초가집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과 낮은 토담길 사이를 걸으며 500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양동마을 안골 깊숙한 언덕 오른쪽에는 경주 손씨 종택인 서백당(書百堂)이 위치해 있다. 서백당은 양동마을에 처음 들어와 정착한 양민공 손소(1433년~1484년)가 지은 고가로,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경주손씨 집안의 대종가다.

▲ 양동마을에 들어와 서백당을 짓고 종가를 이룬 양민공 손소 초상.

△경주 손씨 종택 서백당

현재의 양동마을이 이뤄진 것은 양민공 손소가 처가 마을에 살면서부터이다.

손소에 이어 그의 사위가 된 찬성공 이번도 양동마을의 처가로 장가를 와 그의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두 가문이 500년 넘게 전통을 이어 온 마을로 번창했다.

손씨와 이씨는 서로 좋은 터에 집을 지었고, 오랜 세월을 거쳐 두 가문의 솜씨 있는 기념 건조물들이 양동마을 곳곳에 사이좋게 자리하게 됐다.

양동마을은 주산인 설창산의 줄기가 뻗어 내려 만든 '勿(물)' 자 모양의 능선들이 네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勿(물)' 자는 풍수적으로 깨끗하다는 뜻이며, 이 뜻을 지키려고 양동의 종택은 모두 이들 능선의 가장 높은 곳을 피하고, 그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서백당은 양동마을 매표소를 지나 최근 관광객들을 위해 만든 '양동점방'과 몇몇 식당이 위치한 개울가 포장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면 오른쪽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해 있다.

대문채 입구 양편에는 나무로 만든 20대 종손 '손성훈' 문패와 '양민공 송재선생 경주손씨종택' 현판이 걸려 있다.

그다지 웅장해 보이지는 않지만 위풍을 느낄 수 있기엔 충분한 오랜 기와집 몇 채가, 한 집안의 종가임을 보여주고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3호로 경주 손씨의 대종택인 서백당은 손중돈(1463년~1529년)과 외손인 이언적(1491년~1553년)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은 건물을 지은 기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해 조선 전기의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랑채 뒤편 정원에는 양민공 손소가 양동마을에 들어와 종택을 지을 때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 약 12m 넓이로 가지를 옆으로 길게 뻗은 향나무가 있다.

서백당은 현재에도 사람이 계속 사는 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현출생지지(三賢出生之地)로 알려져 있다.

우재 손중돈(1463년 출생)과 회재 이언적(1491년 출생)이 이미 이곳에서 출생해 명혈중의 명혈로 여겨지고 있다.

이집은 손소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대종가로 집안 대소사를 의논하는 핵심 공간임과 동시에, 오랜 역사와 명성 때문에 수없이 많은 내방객들이 찾아드는 곳이기도 하다.

△종가의 제례와 유품

서백당 동쪽 사랑마당 북편 높은 언덕에는 양민공 손소 내외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불천위 사당이 있다.

불천위 사당에는 좌측 제일 높은 자리에 불천위 자리를 마련하고, 여기서 동쪽으로 차례로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의 4대 신주를 함께 봉안해 뒀다.

불천위 대제는 손소의 기일과 부인 풍덕류씨 기일 등 한 해에 두 차례 지낸다.

손소 종가에는 불천위와 다름없는 제사가 하나 더 있는데, 손소의 화상을 봉안하고 있는 관가정 영당에서 매년 단옷날 모시는 차례가 그것이다.

경주 손씨 종가에서는 불천위 제사를 비롯해 동강서원 제사 등 최근까지 한 해에 큰 제사만 10여 차례 지냈다.

이로 인해 손소 종가의 제사 음식은 다양하고 풍성하면서도 독특한 것이 많아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각종 떡을 비롯해 푸짐하게 쌓아 올린 돔·조기·상어·쇠고기·돼지고기 등과 문어산적·닭산적·대게산적 등 각종 산적, 전·나물· 과일·견과류·탕·쌈·장 등 가까운 동해바다의 해산물부터 육지의 곡류와 육류 음식, 산지의 과일과 채소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양동마을 경주 손씨 종가는 문화재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서백당과 동강서원 등 각종 건축물을 비롯해 손소 부부의 묘비와 석인상, 손중돈 부부의 묘비와 석인상은 물론 서백당 향나무까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또 국보 제283호 '통감속편'을 비롯 '손소적개공신화상', '손소적개공신녹권', '손소자녀칠남매분재기' 등 고문서 가운데서도 문화재가 많다.



△종가를 지키는 사람

현재 서백당은 양민공 손소의 경주손씨 20대 종손인 손성훈(61) 씨가 지키고 있다. 그는 사업 관계로 대구에 거주하고 있지만 주변에서 출퇴근 한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자주 서백당을 찾는다. 집안과 서원 등을 관리하면서 찾아오는 손님들과 주민들을 만나, 갈수록 노령화 되고 있는 마을의 앞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마을 운영위원장으로서 한 달에 두 번 열리는 위원회 모임에 참석해 문화재청 건의 사항 등 대외적인 업무를 논의하기도 한다.

500년을 이어 온 종가의 종손이지만, 세월의 변화를 거스를 수 없어 1년에 10여 차례 지내던 제사를 2~3년 전부터 절반으로 줄였다.

지금은 많은 종가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로, 떠들 필요가 없다며 한사코 얼굴 알리기를 사양하는 종손이지만, 종가의 전통유지를 위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손성훈 종손은 "유교라는 개념자체가 요즘 젊은이들과는 맞지 않는 지배자들의 지배논리라고 생각한다"면서 "양동마을이 박물관이 아닌 주민들이 생활하는 아름다운 전통마을로 유지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21세기에 18세기의 집에서 원형보존을 하면서 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원형보존이 기본인 문화재보호법 때문에 주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양동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은 늘었지만, 빈 집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며 "도시의 아파트에서 생활하던 젊은이들이 전통을 잇기 위해 돌아올 수 있도록 규제 일변도에서 벗어나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세대에도 양동마을이 주목 받는 전통마을로 보존되기 위해서는 문중이나 지역주민들, 나아가 정부에서도 거들어 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종가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기에는 종손 혼자의 힘으로 너무 벅차다는 점을 몇 번이나 되뇌였다.
황기환 기자
황기환 기자 hgeeh@kyongbuk.com

동남부권 본부장, 경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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