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찬히 걸으면 세상이 보여 무심코 지나친 아름다움에 색다른 행복감이 차오를 것

▲ 이상식 시인
지난해 'manspreader'가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됐다. '쩍벌남'이란 뜻의 신조어. 대중교통의 다른 자리를 침범해 다리를 벌리고 앉는 행위를 이른다. 뉴욕시 지하철은 해당 혐의로 체포된 남성이 재판에 회부된 사건도 발생했다. 물론 재발하지 않는 조건의 관대한 판결로 종결됐지만 말이다.

포항에서 대구 방면 고속도로를 가노라면, 청통휴게소 못 미친 지점에 팻말 하나가 눈길을 모은다. '천천히 살아요'라는 정겨운 속삭임. 더구나 '천천히 달려요'가 아니어서 한층 애틋하다. 고속이란 관용어로 질주의 본능을 자극하는 세태에 따뜻이 던지는 충고. 안전 운행하라는 엄마의 샛노란 손수건 같은 당부.

새삼스레 화두를 발견한 듯 한참을 떠올렸다. 달팽이처럼 느리게 살아가기. 돌아보니 헐레벌떡 좇아온 젊음이다. 그렇잖으면 낙오자가 되는 양 앞만 보고 내달렸다. 바삐 먹고 바삐 걷고 바삐 일했다. 오로지 타인과 부대끼는 황망의 뒤안길.

한때 동남아의 한국인 관광객을 보면, 식당 종업원이 '빨리 빨리'를 외친다는 해외 언론 보도는 면구스러웠다. 물론 나름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삶의 질을 까발리는 씁쓸한 자화상이 아닐까. 근래 국립공원의 슬로우 등산 캠페인은 그래서 신선하다. 마음 내려놓고 제발 좀 천천히 걷자는.

언덕 위의 도시 이탈리아 오르비에토. 성곽으로 둘러싸여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슬로푸드와 슬로시티의 발상지이다. 소위 느림의 철학으로 안온한 삶을 추구하는 운동을 최초로 펼친 지역. 중세의 고즈넉한 골목길을 거닐다가 백포도주를 샀었다. 도처에 사이프러스 나무의 수직 경관도 이색적이다.

근년에 탐방했던 신안의 증도는 한국의 첫 슬로시티. 한데도 오르비에토와는 느낌이 다르다. 무엇보다 차량들이 내달린다. 걷는 이를 배려하는 진정한 참살이가 되기는 왠지 모자란다. 이동의 편리를 희생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일상을 한 템포 늦춰서 영위하고자 실천 중이다. 우선 일본의 유명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권유처럼 슬로 리딩(slow reading)의 독서를 한다. 음미하는 지독을 해보니 커피 향기처럼 책의 여운이 진득할 뿐만 아니라, 문장의 오류나 표현의 탁월함도 확연히 들어온다. 속독은 읽은 사실 외엔 남는 게 별로 없다.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공원을 산책할 때는 주변을 정성껏 둘러본다. 이런저런 사색의 여유를 즐기며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기고할 단상을 정리하거나 떠오른 시상을 다듬기도 한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상소는 말했다. 빨리 달려가면 갈수록 삶이 여유로워지기는커녕 더욱 달리라며 채찍질 당한다고.

세파는 우리를 유유자적하게끔 보듬지 않는다. 치열한 경쟁은 한낱 구겨진 삶조차도 핍박한다. 고은 시인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시구 그대로이다. 찬찬히 걸으면 세상이 보인다. 무심코 지나친 소소한 아름다움이 자리를 지킨다. 가끔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가자. 쪼가리 새가슴에 색다른 행복감이 차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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