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전형적 반가…유배도 각오한 충직함 후세 귀감

▲ 안동 권씨 충재 권벌 선생 종가와 사당 전경.

충재 권벌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다.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沖齋)·훤정(萱亭),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연산 2년(1496)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 사관(史官)과 삼사(三司) 및 승정원(承政院)과 각 조(曹)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고위관직에 재직할 때는 대의를 위해서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화를 연이어 입었다.

그러나 선비로서의 강직함과 격조를 간직했으며 평소 '근사록(近思錄)'을 애독하시며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까지 하였다.

특히 을사사화 때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문정왕후(文定王后)에게 윤원형(尹元衡)을 위시한 소윤(小尹)일파의 전횡과 무고하게 화를 입은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의 삼대신(三大臣)을 구하는 논지의 주장을 강력히 피력했다.

당시 올린 '충순당입대계사(忠順堂入對啓事)'와 '논구삼신계(論救三臣啓)'는 그 내용이 너무나 충직해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됐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명종 21년에 신원(伸寃)되어 관작(官爵)이 복원되고 선조조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봉화(당시는 행정구역상 안동)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본래 닭실마을은 권벌의 5대조가 안동에서 옮겨와 자리 잡은 곳이다. 권벌 이래로 매우 번창했기 때문에 이들을 대외적으로 알려진 안동 권씨말고 특별히 마을의 이름을 따 '유곡 권씨'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곳은 충재 권벌 선생의 후손이 500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본터이며 많은 인재를 배출한 마을로서 사적 및 명승 제 3호인 '내성 유곡 권충재 관계유적' 으로 지정되어 있다.

대부분의 유곡 유적들은 권벌이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던 동안 머물면서 일군 자취들로서 선생의 종가와 빼어난 외관으로 유명한 정자인 '청암정(靑岩亭)'이 있다.

또한 종가 옆에 위치한 기념관인 유물각에는 현재 '충재일기', '연산일기', '세초도', '근사록' 등 문화재 467점이 전시돼 있다.

△닭실마을
봉화읍에서 36번 국도 구도로를 따라 2㎞쯤 가면 창평천이 감싸 돌며 동서로 길게 누워 있는 고즈넉한 한옥동네, 닭실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동네는 동쪽에는 행정상 유곡 2리에 속하는 '해를 토한다'는 뜻의 '토일' 또는 '묘(12지의 토끼) 방향에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의 묘곡이 위치해 있고, 닭실은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유(12지의 닭) 방향에 해가 지는 곳'이란 뜻에서 유곡이라 하는 유곡 1리에 속한다.

유곡은 한글로 풀어서 닭실마을이라고도 하는데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마을 동북쪽으로는 문수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있고 서남으로 뻗어 내린 백설령의 모습이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이다.

동남으로는 옥적봉이 수탉이 활개치는 모습이어서, 마을의 서쪽 산에서 이것을 바라볼 때 '금계포란'형 즉,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 한다. 마을 이름이 닭실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닭실마을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와 함께 '삼남의 4대 길지'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다.

유곡일대의 봉화지역은 전란의 피해가 없는 십승지지의 하나이기도 하다. 풍수지리에서 명단은 산, 강 그리고 바람 등 자연의 기운에 의하여 형성된다. 이곳 닭실의 지세를 풍수이론으로 분석하면 역시 명당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길지이다 보니 최근 우리나라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다. 드라마 '바람의화원' 에서 신윤복(문근영), 김홍도(박신양)가 물그림자를 드리우고 서있던 돌다리는 바로 청암정다리 였다.

또 드라마 '동이' 에서는 밤에 홀로 나와 고민에 빠진 숙빈(한효주)의 모습을 찍은 곳이 바로 이곳 청암정이고 '정도전'에서 정도전(조재현)과 정몽주(임호)가 허심탄회하게 시국을 논의하는 장면 역시 청암정이었다.

드라마에 의해 닭실마을이 널리 알려지면서 한옥마을의 특징인 고즈넉한 분위기, 한옥과 흙담, 꽃의 그림같은 풍경으로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명소가 되고 있다.

△청암정
충재는 1526년 봄에 자신의 집 서쪽에 재사를 짓고 다시 그 서쪽으로 사 6칸을 바위 위에 지어 주변에 물을 돌렸으며 이어서 동문 밖에 대를 쌓았다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종택 서쪽으로 난 돌담을 통해 작은 쪽문을 나서면 나오는 곳, 청암정이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작은 3칸 건물이 충재의 서재이고 이곳에서 공부하다가 바람을 쐬일 양으로 지은 곳이 휴식공간인 청암정으로, 커다랗고 넓적한 거북바위 위에 올려지었다.

건물을 빙 둘러서 연못 척촉천을 두르고, 돌다리를 건너야 정자로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운치가 있다. 주위에는 향나무, 느티나무, 단풍, 철쭉, 개나리꽃이 어우러져 자연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청암정의 경치를 두고 "정자는 못 복판 큰 돌 위에 있어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고리처럼 둘러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권벌은 영남의 주도적인 학자들인 이현보, 손중돈, 이언적 등과 교유하고 23년 연하인 퇴계 이황과도 학문적인 공감을 나누었는데, 그래서인지 이 청암정에는 충재의 친필 글씨 말고도 퇴계 이황, 번암 채제공, 미수 허목 등 조선 중후기 명필가들의 글씨로 새긴 현판이 여럿 걸려 있다.

특히 '청암수석(靑巖水石)'이란 현판은 미수 허목의 글씨인데, 그 옆에 글씨의 내력과 허목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그의 안타까운 심정과 함께 그를 기리는 마음을 절절하게 적어놓았다.

△충재 종가
충재종가는 마을의 서쪽에 위치한 규모가 큰 기와집이다.

종가는 대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사랑채가 있고 중문을 들어서 안채가 자리한, 전형적인 영남 반가의 □자 집이다.

마당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종가가 있고 서쪽으로 유물각이 자리잡고 있으며 안쪽으로 충재가 지은 청암정 일곽이 있다.

유물각에는 충재가 예문관 검열로 있을 때의 '한원일기'나 1518년 부승지와 도승지를 할 때의 '승선일기' 등 일기 7책을 일괄해서 엮은 '충재일기(보물 제261호)'와 권벌이 중종에게 하사받아 늘 지니던 '근사록(近思錄)' 등 여러 권의 책과 중종이 권벌에게 내린 교서와 이 집안에서 자식들한테 재산을 나누어줄 때 기록해 놓은 분재기, 호적단자, 1690년에 그려진 '책례도감계병' 등의 고문서, 충재와 퇴계, 미수 등의 서첩과 글씨 등 문화재 467점이 전시되어 있다.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우리나라의 빼어난 명승지 중 하나로 손꼽기도 한 이곳은 주위의 울창한 소나무 숲과 자연경관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는 명승지이다.

▲ 충재 권벌 선생 종손 권종목씨.
현재에는 충재 18대 종손 권종목(74)씨가 1943년에 종가에서 태어나 조상을 받드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종손으로서 70여년째 종가를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고, 충재 19대손 권용철(43)씨는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근무하다가 종가 옆에 7년전에 충재박물관을 지으면서 내려와 아버지를 이어 다음 종손이 될 사람으로서 종가의 고택과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다.

종부는 5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장차 종부가 될 권용철씨 부인 권재정(41·예천권씨)씨가 종가의 살림을 이어 받아 살고 있다.

충재 권벌 종가에서는 임금께서 충재 권벌 내외에 내린 불천위제사를 드린다. 불천위제사는 음력 3월 26일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종가에서 거행되는데 기제사의 특수한 형태이다.

불천위란 4대를 지나도 사당에서 신주를 옮기지 않고 자손대대로 영원히 제사를 받을어 모시는 신위를 말한다. 국불천위는 국가에 큰 공헌을 한 공신이 주로 그 대상이 되었으므로, 나라에서 불천위를 인정받는 것은 그 후손과 가문의 영광이며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박문산 기자
박문산 기자 parkms@kyongbuk.com

봉화 담당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