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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은의 풍수이야기 (22) - 안동·예천 새경북도청지

주산 검무산 기운받아 '천년 태평성대' 누릴 명당 중의 명당

등록일 2016년02월11일 21시47분  
▲ 경북도청 신청사를 품고 있는 검무산.
▲ 양동주 대구한의대 대학원 겸임교수
한 나라의 중심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중심도시가 있으며 그 중심도시는 행정 사법 입법기관이 그곳에 있어서 나라살림을 꾸려나가는 국가의 심장부가 되는 것이다. 신라는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지금의 경주에 월성을 쌓고 그곳에 왕궁을 지은 후 나라를 통치하는 중심이 되었으며, 고려는 개성을 조선은 지금의 서울인 한양을 중심으로 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중심도시로 발전하고 국가를 지탱하여 온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도읍을 정할 때 여러 일화가 있지만 그중에 무학대사와 삼봉 정도전의 도성내의 궁의 배치를 두고 설전을 벌인 일화로 정도전은 지금의 경복궁 위치에 북악을 주산으로 하여 남향을 주장한 반면에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향으로 궁의 전각을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의 실세였던 정도전의 뜻대로 도읍과 궁의 전각 좌향이 정해져 500년 조선을 이어 지금의 서울이라는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나라의 수도를 정하는 문제나 오늘날의 지방자치의 행정을 포함한 중요 기관의 중심이 될 지방의 행정중심도시를 정하는 문제는 함부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행정권이 미치는 곳까지의 중심적인 위치가 되는지, 사통팔달의 교통이 원활하여 모든 사람이 접근이 용이한 곳인지, 지형지세로 보아 외세의 침범에 따른 해를 입지 않을 곳인지, 많은 사람이 운집하여 살 수 있는 도읍을 형성할 만한 곳인지, 그 지방의 융성을 가져올 만한 곳인지, 즉 물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바람을 막아 주어야 하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그런 곳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하지 못한 곳은 대부분 얼마가지 못하여 소멸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도읍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존망과 국운의 기운까지도 가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의 수도를 정하는 것과 다름 아닌 지방의 관청을 정하는 것도 이러한 이치를 잘 살펴서 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위치하고 있는 지금의 경북도청 자리는 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300년 지기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대구권역과 경북권역으로 자치권이 나누어지면서 경북권을 대표하는 도청이 지금의 자리에서는 상징성과 대표성을 많이 상실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대구권을 뺀 경북권에서 도청이 들어갈 만한 곳을 선정하는 기구가 만들어져 경북도청 신도시 터는 2008년 6월에 이전지로 확정된 이후, 풍수지리적으로 주산인 검무산을 중심으로 좌청룡의 정산(井山)과 우백호의 거무산, 그리고 안산인 시루봉·마봉과 조산격인 봉화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어서 최종결과 경북 예천군 호명면과 안동시 풍천면 지역에 도청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선정과정은 접어두고 풍수지리학자로서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지금의 도청자리가 어떠한 곳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신라의 최북단에 위치한 예천군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제19대 눌지왕(417~458) 때 '수주촌'이라 하였다가 신라 제22대 지증왕 6년(505)에 '수주현'으로 되었고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 16년(757)에 영안(풍산), 안인(동로, 산북 일부), 가유(산양), 은정(상리, 하리)의 4현을 영속시켜 예천군이 되었다고 한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는 퇴계를 비롯한 기라성 같은 유학자들이 나오게 된 토양이다. 예천은 조선시대의 문과급제자 중 가장 많은 62명을 배출한 지역이다. 이것은 큰 고을인 경주 52명, 밀양 32명, 대구 27명 등에 비해 많다.

예천의 유명한 마을인 금당실마을(금당곡(金塘谷) 혹은 금곡(金谷))은 지형이 蓮花浮水形이라 하여 金塘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이름난 풍수 남사고(南師古)가 말하기를 이 마을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음이 아쉽다고 하여 그 뒤부터 "금당맛질 반서울"이란 말이 생겼다고 하고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곳 중의 하나이며 정감록에는 "금당실은 우리나라 十勝之地의 하나로 兵火가 들지 못한다"고 해 임진왜란 때 온전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예천(醴泉)이 예부터 물이 좋다는 것은 지명이 말해준다. 한자로 단술 예(醴), 샘 천(泉)자를 쓴다. '예(醴)'를 풀어보면 닭 유(酉), 굽을 곡(曲), 콩 두(豆)의 삼합이다. 닭이 구부려 콩을 먹는 형상이 그려진 평화와 풍요의 땅으로 주천(酒泉)이라는 샘이 노하리에 있고, 수질 좋은 감천(甘泉)온천이 있다. 예천의 예천군수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관아(1932년 이전에는 대심동에 위치) 옆 연못이 있는 반학정에서 공부했던 다산 정약용은 예천을 일러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했다고 한다. 인문학과 유학의 못자리란 뜻이다.

예천읍은 뒤에서 흑응산이 아늑하게 안아주고 굽이치는 하천이 S자로 구불구불 흐르는 한천(漢川·일명 漢水)이 생명수로 흐르며 한천 앞에 남주작의 남산(南山)이 있다. 남산은 서울 경주 울산 청도 등 몇 군데 밖에 없다. 더군다나 한천과 함께 있는 곳은 서울 이외는 드물다. 한천의 상류 금곡천도 '북한천(北漢川)'으로 개칭하면 한천과 더 어울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다음으로 도청이 위치한 안동시 풍천면 갈전리(葛田里)를 살펴보자. 갈전리는 본래부터 풍산현 지역으로 갈대밭이 있었으므로 갈밭, 갈전(葛田), 가을전(加乙田)으로 불리다가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풍서면으로 편입되었다. 갈전리의 주산은 검무산이다.

검무산의 청룡쪽으로 이어지는 산은 정산(井山)으로 가곡마을(가일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거물산 동쪽에 있고 산 위에 오래된 우물이 있어 정산이라 한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로 보아 당시는 검무산을 '거물산'으로 불렀다. 팔역지(八域志)에는 정산지하(井山之下) 활만인(活萬人)이라 했다. 가곡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옥정봉(정산 봉우리)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다고 하나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마을 입구에 접어들면 왼편으로 큰 가곡지가 있어서 마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하며 연못 주위에 엄청난 크기의 회나무가 서 있는데 동네 정자나무로 군락을 이룬 이 나무에 의해서 커다란 그늘이 만들어지고 학동들이 글공부를 하기도 했다고 해서 학자수라 부른다.

검무산의 백호쪽으로 이어지는 산은 소검무산이라는 거무산과 봉황산이며 산 아래의 산합리(山合里)는 본래 예천군 위라면(位羅面)의 구역으로서 두 산(山)이 합한 곳에 있으므로 새내비, 또는 산합이라 하였다고 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우음동(牛音洞), 신기동(新基洞)을 병합하여 산합이라 해서 예천군 호명면에 편입되었다.

검무산의 안산에 해당하는 도양리(道陽里)는 본래 풍산면 지역으로 양지쪽이 되므로 되양골 또는 도양골이라 하였는데 중종(中宗) 때 관찰사(觀察使) 김연(金緣)이 살면서 도왕동으로 고쳤으며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안동군 풍서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자방동, 상좌동, 구담동의 각 일부와 예천군 위라면의 산합동 일부를 병합하여 도양동으로 다시 바뀌었다.

도청의 수구비보(水口裨補) 역할을 하는 호민지는 청사의 좌우에서 모여드는 물을 거두어 모이게 하여 안의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풍부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이 호민지는 여자지(女子池)로도 불리는데 신라 때 시설하였다고 전해지며 가일못과 함께 넓은 풍산들의 관개용수를 공급하던 젖줄이기도 하다. 그러나 못을 축조하고 난 후 큰 비만 오면 둑이 무너져서 농작물과 주민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가져오게 되자 모두 걱정이 태산 같았다고 한다. 이때 우연히 이 길을 지나던 여자가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이르기를 "여수구(무너미)를 만들어 두면 괜찮을 것"이라고 일러주기에 그렇게 했더니 그 다음부터 둑이 터지지 않아 이때부터 여자지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또한 도청 내에 조성된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큰 인공 못도 역시 같은 풍수비보 차원으로 볼 수 있는데 지금은 물을 채우지 않았으나 청사가 완공되면 물을 채워 사시사철 물이 가득 찬 연못을 조성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경북도청의 풍수적 분석을 해보자. 백두대간의 큰 용맥이 태백산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서남쪽으로 크게 힘을 자랑하듯 달려와 호랑이가 움추려 먹이를 노려보듯 힘을 모으는 자세에서 볼 수 있듯이 대간맥은 용트림을 하는 모습으로 진행한다.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 구룡산(해발 1,345.7m)에서 선달산(해발 1,239m)으로 진행하는 가운데 동남쪽으로 뻗어 나온 맥이 문수지맥인데 이 맥은 문수산(해발1,207.3m)을 조종산으로 하여 여러 간룡맥을 내어주고 남쪽으로 뻗어 나온다. 문수지맥은 잠시 숨을 고르듯 낮게 엎드려 마치 순한 양이 된 모습으로 내룡하여 힘을 비축한 다음 다시 용오름을 하여 만리산(해발 791.6m)를 만들고 서남쪽으로 방향을 튼 용맥은 용두산(해발 664.6m)을 성봉하여 기운을 자랑하고 연이어 조종산의 산봉우리를 만들고 신도청이 있는 검무산(해발 332m)의 부모산인 학가산(해발 882m)에서 크게 입체성봉하여 큰 생기가 응축되었다.

학가산에서 검무산에 이르는 용맥의 흐름은 크고 길게 이어온 여정에 쉬어가는 듯 낮으면서 여러 갈래로 분주하게 자식을 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용맥 위로 중앙고속도로와 34번 국도, 그리고 924 지방도가 가로 지르는 것은 용맥의 선에너지의 손실을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경북도청 자리는 검무산이 주산이 되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주산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혈을 만들어주는 핵심적인 기능을 하는 중심용맥과 청룡과 백호를 거느리고 물이 나가는 수구가 잘 짜여져 있어야 명당의 조건을 갖출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사신사 중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안산의 구성, 또한 중요하다. 검무산에서 가곡리로 이어지는 청룡은 924지방도에서 신도청으로 연결된 도로를 내어주는 과협을 하고 다시 크게 성봉(井山)하여 가곡리의 명당을 만들고 여자지(호민지)에서 끝을 맺어 신도청의 청룡역할에 충실하다. 이에 반해 백호맥은 낮고 약하여 그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따라서 백호쪽에는 대단위 주거지를 조성하고 둑을 쌓고 키 큰 나무를 심어 서북쪽에서 불어드는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경북도청의 안산(案山)은 1안으로 백호맥 끝자락에 성봉한 해발 150m의 산이 되어야하고 2안으로는 시루봉과 마봉이 되며 3안으로는 낙동강 넘어 봉화산이 된다.

수세는 내수세와 외수세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외수세는 동남으로는 낙동강이 서북으로는 내성천이 흘러 용궁면 회룡포에서 합수하여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흐르고 있으며, 내수세는 신도청지의 주산인 검무산에서 발원한 물이 낮고 약한 백호맥이지만 결속이 좋아 외수와 다르게 동쪽으로 흘러 여자지(호민지)에 모여 하회삼거리 쪽으로 하여 동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하고 있는데 이러한 수세는 수도 서울의 청계천의 흐름과 유사하다. 따라서 신도청지는 주산이 뚜렷하고 청룡이 왕성하며 안산과 수세가 풍수지리적으로 잘 맞아 청룡맥의 과협과 낮은 백호맥에 풍수적인 보완을 하면 천년의 태평성대를 기대할 만한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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