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는 700년 도읍지

▲ 회랑 밑에서 본 안민관(도본청)의 모습.
'경상도(慶尙道)'는 대표 고을인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앞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올해는 '경상도(慶尙道)'라는 도명(道名)이 사용된 지 702년이 되는 해다. 고려 충숙왕 원년인 1314년 경상도라는 이름을 얻은 경북도가 개도 702주년을 맞아 재도약을 노리고 있다. 경북도청이 대구 산격동시대를 마감하고 안동·예천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경상도 개도 702년

경상도라는 도명이 1314년(고려 충숙왕 원년)에 정해진 이후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로 나눠진 1896년(고종 33년)까지 경북도는 조선시대부터 국가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경상도의 등장(1314~1392)

918년 고려가 건국한 뒤 지방행정체제는 신라의 9주(州)에서 군현제(郡縣制)로 바뀌었다. 그 뒤 성종(재위 981~ 997) 2년(983)에는 12목(牧)으로, 성종 14년(995)에는 10도(道) 채제로 바뀌었다. 현종(재위 1009~ 1031)때 이르러 5도 양계(兩界) 체제가 완성됐다.

경상도 일대의 도명(道名)은 5도 체제 속에서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 경상주도(慶尙州道),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 등으로 계속 바뀌었다.

충숙왕(재위 1313~ 1330) 원년(1314)에 이르러 비로소 '경상도'가 등장했다.

고려의 동경(東京)이었던 경주(慶州)와 교통의 요충지였던 상주(尙州)의 중요성을 감안해 '경상도'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1392년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었음에도 경기도라는 이름은 변함없이 쓰였다.

2.경상감영 1기(경주·상주 시기/1392~1593)

1392년 개국한 조선은 경주에 경상도 감영을 뒀다. 경주를 다스리는 부윤(府尹)이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를 겸했다. 그러다가 1407년(태종 7) 경상도의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관리하기가 힘들어지면서 조정에서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쪽을 우도(右道), 동쪽을 좌도(左道)로 나눴다.

좌도는 경주 부윤이, 우도는 상주 목사가 각각 관찰사를 겸했다. 이듬해 좌도와 우도를 다시 합쳤다. 경주에 있던 감영을 상주로 옮겼다. 상주 감영은 임진왜란 직후까지 약 200년동안 그 지위를 유지했다. 경주와 상주에 감영이 있던 시기에 조선 왕조는 유교를 기반으로 나라의 정통성을 확립해 갔고, 통치체제를 정비했다. 세종대왕때는 한글 창제, 과학 발달, 농서 발간 등 다방면에서 크게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경상도 출신 인재들도 크게 활약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사림(士林)이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성장했고 이들은 사상 논쟁으로 다양한 학파를 형성했다. 경상북도는 양남학파의 중심지로써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이 나라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이끌어 나갔다.

이처럼 경상감영 1기는 조선 개국부터 임진왜란 직후까지의 시기로서 많은 인재들이 등장해 그들이 낳은 사상과 문화가 융성했던 시기였다.

3.경상감영 2기(성주·달성·안동시기/1593~1601)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 반발로 경상도 전역은 전쟁터가 됐다. 주요 도로 대부분을 왜군이 장악했다. 관군의 연패로 전쟁의 길목에 위치한 상주의 감영은 제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긴급히 경상감영을 경주와 상주로 나눠 교통로를 확보하고 보고체계를 원활히 하고자 했으나 전세는 불리하게 기울었다.

1593년(선조 26) 경상감영을 성주의 팔거(현 칠곡군)로 옮겼다. 1595년(선조 28) 임진왜란이 휴전기에 접어들자 경상감영은 다시 경주와 상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란중에 대구가 전략적 요충지로 부각됐고, 1596년(선조 29) 경상감영을 대구 달성으로 옮겼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대구의 달성감영은 안동으로 긴급히 옮겼다. 1601년(선조 34) 대구감영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4년 동안 안동에 감영이 있었다.

이처럼 불과 10년도 안되는 기간동안 경상도의 최고 행정기관이었던 감영이 빈번하게 옮겨 다녔다. 이는 경상도 지역의 급박했던 전쟁 상황과 도민들의 피해가 심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4.경상감영 3기(대구 시기/1601~1895)

임진왜란때 자주 옮겨 다녔던 감영은 1601년(선조 34)에 이르러 비로소 대구에 정착했으며, 1895년(고종 32) 감영이 폐지되기 전까지 존속했다. 이 기간중 관찰사가 지속적으로 머무르게 되면서 감영은 차츰 안정됐다.

17세기는 임진왜란 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던 때였다. 대동법의 실행, 상평통보의 발행 등 경제 개혁 정책들이 시행됐으며, 농업과 상업도 발달했다. 경북의 양반들은 성리학적 규범속에서 향약을 결성해 향촌질서를 유지했다.

18~19세기에 경상북도 사람들은 정치, 사회, 예술 전반에 걸쳐 성숙한 문화를 꽃피웠다. 당시에 시대적 특징들을 실학의 도입과 서학의 유입, 진경산수의 발달, 출판물의 확산 등의 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경상감영이 대구에 300년 가까이 존속하고 있는 동안 경상북도는 안정된 상황속에서 다방면에 걸쳐 발전을 거듭했다.

1910년 대구 중구 포정동(현재 대구 경상감영공원 자리)에 청사를 지었다가 1966년 지금의 산격동으로 옮겼다.

1981년에는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해 분리됐으나 소재지는 이전하지 않은 채 35년 동안 행정구역이 다른 대구시에 더부살이 해왔다.

1991년 지방자치제 부활과 함께 도청이전 문제가 공론화됐다. 지난 2006년 민선 4기 김관용 도지사의 취임 선거공약으로 내 건 도청이전을 본격적으로 논의해 마침내 2008년 안동·예천으로 도청을 이전키로 결정하게 됐다.

이후 신도시건설, 청사건립 등의 6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대구시와 분리된 후 35년 만에, 산격동에 둥지를 튼지 50년 만에 안동·예천으로 도청을 옮겨가게 됐다.



△산격동 50년간 많은 변화와 엄청난 성취

50년간의 산격동 경북도청 시대는 대한민국 역사발전과 괘를 같이 하면서 그동안 많은 변화와 엄청난 성취를 일궈왔다.

구미와 포항을 중심으로 한 양대 산업축은 우리나라 산업발전을 선도해 왔으며, 경북에서 태동한 새마을운동은 조국 근대화의 동력이 됐다.

대구시와 분리되기 전인 1975년 기준으로 경북의 인구가 경기도의 400만명을 능가하는 485만이었을 정도로 그야말로 웅도였다.

이후 수도권의 급속한 팽창, 중국경제의 부상에 따른 서해안권의 약진 등으로 다소 주춤하기도 했지만 민선자치 이후 경북의 부상은 괄목할만했다.

현 김관용 도지사에 앞서 산격동을 거쳐간 역대 도지사로 박경원, 김인, 양탁식, 김덕엽, 구자춘, 김수학, 김무연, 김성배, 정채진, 이상희, 이상배, 김상조, 김우현, 이판석, 이의근, 우명규, 심우영, 이의근(민선) 도지사 등이 있다.

산격동 경북도청은 129만㎡의 부지에 경북도청을 비롯해 도의회, 경북경찰청, 경북도교육청, 경북선관위 등의 기관이 들어서 있다.

김관용 도지사는 이날 기념사를 통해 "지난 700여년간 역사의 중심에서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것은 경북인이 흘려온 땀방울이다"며 "도청이전을 계기로 새로운 마음가짐을 통해 그동안 우리나라의 중심에 있었던 경북도가 다시 한번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우뚝 서겠다"고 말했다.
양승복 기자
양승복 기자 yang@kyongbuk.co.kr

경북도청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