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태 전 검찰총장

四海松雲老(사해송운노·이 넓은 세상에 이 늙은이는)
行裝與志違(행장여지위·차림새와 생각이 서로 어긋나네)
一年今夜盡(일년금야진·한 해도 오늘 밤으로 다하는데)
萬里幾時歸(만리기시귀·만 리 먼 땅 돌아갈 날 언제이리)
衣濕蠻河雨(의습만하우·옷은 오랑캐 나라의 비에 젖는데)
愁關古寺扉(수관고사비·옛 절의 사립문이 닫힌 걸 근심하네)
焚香坐不寐(분향좌불매·향을 피우고 앉아서 잠들지 못하니)
曉雪又霏霏(효설우비비·새벽 눈이 부슬부슬 내리네)


조선시대 사명 유정(四溟 惟政)스님의 시 '재본법사제야 (在本法寺 除夜)'이다.

스님은 맹자(孟子)를 읽다가 출가할 뜻을 품어 직지사에서 중이 됐으며 제방을 순력하며 수행 중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청허(淸虛)의 법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요청 등에 의해 승군을 통솔해 평양성 회복 등 수 많은 전공을 세웠고, 뛰어난 지혜와 배포로 왜장들을 감복시켰으며, 임진란후 누구도 가길 꺼렸던 일본에 가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부터 부처님 같은 대우를 받았고 포로송환과 양국 관계회복 등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공식사절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개인자격도 아니었다. 보내는 쪽도 그렇게 보냈고, 받는 쪽도 그렇게 받았다. 당시의 양국관계가 그랬다. 당시의 상황이 어느날 갑자기 왜군이 일방적으로 쳐들어와 조선 산천을 뒤집어 놓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문화재 등을 약탈한 후 이들을 끌고 일방적으로 철수해 버린, 바로 그런 상태에 있었다.

힘은 없으면서도 명분만은 입에 담고 사는 사이비 성리학자들이 오랑캐와 어떻게 교섭할 수 있느냐는 등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선으로서는 무언가 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그가 사절아닌 사절로 간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간 사람은 생사에 요달(了達·다 알아낸)한 선승(禪僧)이었고, 맞이하는 쪽은 일본땅을 통일한 최고실력자로서 불법에 상당한 이해가 있는 도쿠가와 였다, 이 처참하고 혼란한 와중에 그래도 이것은 조선과 조선 백성에 복이었다.

서로 대면하자 말자 도쿠가와가 먼저 스님의 견처(見處)를 요량(料量·앞일을 잘 헤아려 생각함)했다. "돌 위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石上難生草·석상난생초), 방안에는 구름이 일기 어렵다(房中難起雲·방중난기운). 그대는 어느 산의 새이기에(汝爾何山鳥·여이하산조) 봉황이 노는 데 왔는가(來參鳳凰群·내참봉황군)"말하자면, 잡새도 제대로 살기 어려운 땅의 잡새축에도 못끼는 새가 어찌 감히 봉황이 노는데 왔느냐고 겁박한 것이다. 이에 사명이 "나는 본래 청산의 학이어서(我本靑山鶴·아본청산학) 항상 오색 구름위에 노닐었는데(常遊五色雲·상유오색운) 하루 아침에 운무가 사라져서(一朝雲霧盡·일조운무진) 꿩들이 노는데 잘못 떨어졌다(誤落野鷄群·오락야계군)"라면서 바로 판을 뒤집었다. 도쿠가와가 어떤 대접을 했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할 것이다.

이 시는 외교사절로 일본에 가서 교토소재 본법사란 절에서 제야를 보내는 심정을 그리고 있다. 수행하는 승려가 본분사는 제쳐둔 채 전투와 외교로 내달리는 그의 처지를, 그것도 섣달 그믐날 밤에 적국 일본의 절에서 맞는 소회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겁에 쌓인 세속의 업연은 그의 이런 심정에도 불구하고 그를 시정으로 내몰기만 했으니 부처님의 대자대비도 숙연(宿緣·오래 묵은 인연)을 넘을 수는 없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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