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부터 현대를 관통하는 최고의 스토리텔링 생산지

▲ 선사시대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 금장 절벽 위에 지난 2012년 새로 지어 올린 금장대가 오똑하게 올라 있다. 금장낙안, 지금도 금장대를 휘돌아 흐르는 형산강물에는 물새들이 날아와 한가롭게 놀고 있어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금장대를 말하기 전에 금장대를 향해 돌진하는 두 물줄기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이겠다. 경주 시가지를 관통하는 모든 물길은 예기소에서 만나 큰 물줄기를 이루고 영일만으로 흘러들며 강으로서의 생을 마감한다.

모든 물길은 북천과 남천, 서천이다. 황성동 용강동 등 구도심의 북쪽에 아파트단지들이 번다하게 들어서기 전까지 본래 경주시가지는 바다가 있는 동쪽 말고 나머지 3면은 강이 땅을 갈라놓은 섬 형국이었다. 동쪽은 대본과 감포 앞바다, 대한해협에 막혔고 남쪽은 남천, 북쪽은 북천이, 서쪽은 서천이 땅을 갈랐으니 딱 섬이다.

남천은 토함산에서 발원해 남산 앞으로 흐르다 반월성과 오릉을 거쳐 일찌감치 서천과 합쳤다. 북천은 추령재에서 시작해 덕동과 보문을 거쳐 시가지 북쪽을 지나 서천과 만난다. 울주군에서 발원한 서천은 내남 이조리 근처에서는 '기린천'으로 불리다가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있는 율동 근처에서 '장매'로 이름을 바꿨다. 고속버스터미널이 있는 사정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천'으로 불린다.

서천은 오릉에서 서진하는 남천과 미리 합류해 세력을 불린 뒤 성건동 경주여고를 막 지나온 북천과 예기소에서 몸을 섞어 형산강이라는 이름으로 영일만 앞바다로 흘러든다. 서천과 북천 두 물줄기는 산언덕의 바위벽에 부딪혀 때 휘감아 돌며 몸을 섞는데 소용돌이를 치면서 깊은 소를 이룬다. 이곳이 예기청소다. 물이 부딪히는 직벽, 꼭짓점 위에 금장대가 들어서 있다.

성건동 동국대 앞 상가에서 동대교를 건너 동대병원 정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수도산 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접어들어 기차터널 아래를 통과하면 왼쪽에 강물을 낀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에서 나무 계단을 오르면 금장대다. 봄 여름에는 계요등, 닭의 장풀 같은 희귀한 야생화가 흐드러져 꽃을 보는 재미도 솔찮다.

▲ 금장대 근경.
지금의 금장대는 2012년에 복원했다. 신라시대 석축과 기단을 발굴한 뒤 안압지 건축양식에 신라시대의 문양과 색을 넣어 단청했다. 복원한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금장대는 청동기와 신라, 조선, 현대를 관통하는 수천년 동안 최고의 스토리텔링 생산지였다. 청동기 암각화에서부터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와 그림, 소설의 탄생지였으며 주무대였다. 수없이 오랜 세월 아름다운 경관을 유지해왔다는 뜻이다.


금장대를 대표하는 스토리는 '금장낙안'. 경주에는 신라시대때부터 전해오는 삼기팔괴가 있다. 세가지 보물과 여덟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말한다. 신라의 여덟가지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가 '금장낙안'이다. 형산강의 풍경이 아름다워 기러기도 쉬어간다는 뜻이다.

금장대는 철새 도래지다. 철 따라 기러기 청둥오리 백로 왜가리가 떼를 지어 날아와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5월 어느 봄날에 금장대와 예기소에 철새들이 색종이처럼 내려 앉았다가 분수처럼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넋을 잃은 적이 있다.

강에 내려앉을 때는 날개를 편 채 날갯짓을 멈추고 바람에 몸을 맡기며 중력과 부력 사이를 저울질하며 팔랑거렸다가 날아오를 때는 두드덕 날개짓을 하며 방사형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에는 백로와 청둥오리 수백마리가 서식하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

금장대에서 보면 북천과 서천 두 갈래 물길이 발아래 흘러 들어오는 경관이 짜릿하다.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시가지를 조망하는 타워 역할도 제대로 하고 있다.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특성 때문에 임진왜란 때는 왜적에게 밀려난 조선군이 경주읍성을 탈환하기 위한 군사 지휘 본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라고 했던 황지우의 시가 생각나 무릎을 쳤다. 경승지는 군사용 초소로도 아주 유용한 곳이다. 그러나 대개는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시인 묵객이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명소로 활용됐다.

특히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은 '금장낙안'의 경관을 보며 신라의 흥망을 노래하거나 자연의 영원함과 인간 삶의 부질없음을 한탄하기도 했다.

누대 위에서 바라보는 넓은 봄 경치 날은 저물었으니,
옛날 일을 슬퍼하며 다시 높은 누대에 오른들 어찌 견디랴.
언덕 동산에는 냉이와 보리가 봄빛을 다투고, 성곽이나 백성들은 옛날과는 다르구나.
완적은 애오라지 광무성에 올라 초한(楚漢) 전쟁터를 보며 탄식했고
양호의 종사(從事) 추담은 부질없이 현산의 슬픔을 지었구나
흥망은 만고에 이 금장대와 같거늘, 슬픈 노래로 시경의 서리편을 읊을 필요 없으리

조선시대 학자 조위의 '금장대 이수'

▲ 금장대 암각화.
금장대는 본래 금장사지로 추정되는 신라시대 절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사리공양석상이 발굴됐다. 윗부분이 떨어져나간 높이 82cm의 원형 기둥에는 전체적으로 여의두문과 화문으로 방곽을 두르고 향로로 추정되는 공양구를 중심으로 5구의 보살상과 가릉빈가가 경의를 표하는 조각상이다. 당시의 사리공양의식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청동기 시대 암각화는 금장대 바로 아래 바위벽에 있다. 얼굴그림, 사람발자국, 동물발자국이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가 심하다.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 봐도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 암각화 앞에는 평평한 바위면이 있고 그 아래 아찔한 낭떠러지가 나오는데 '자살바위'다. 신라 자비왕때 을화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회를 즐기다 실수로 빠져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을화가 빠져죽은 물이 예기소다.

예기소는 김동리 소설 '무녀도'의 주무대이다. 김동리의 집은 예기소에서 걸어서 5분거리에 있는 성건동에 있었다. 그는 10대 후반 시절 이곳을 거닐며 산책을 하며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예기소는 무녀 모화가 비명에 간 부잣집 며느리의 혼을 위로하고 '예수귀신이 진짜인가, 신령님이 진짜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굿을 하다 죽는 장소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신라의 여덟가지 아름다운 경관의 하나로 꼽혔던 예기소는 신라의 패망이후 오랜 세월 음울하고 슬픈 기억들로만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경주사람들은 예기청소를 애기도 빠져 죽고 청년도 빠져죽고 소도 빠져죽는 '무덤'으로 풀이해 '애기청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예전에는 예기소를 건너려면 배를 타고 다녀야 했다. '금장도선장'이라는 나루가 있었다는 천변에는 자전거, 인라인스케이트 전용도로, 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있고 그 옆에는 예기소 푸른물 보다 더 푸른 잔디 공원이 조성돼 있어 예기소의 우울한 전설을 상쇄시키고 있다. 강과 금장대 산책을 나선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해 보였다.

□ 금장대 출토 사리공양석상(舍利供養石像)

1980년대 금장대 부근에서 발굴돼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높이 82㎝정도의 원기둥형 형태인데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전체적으로 여의두문과 화문으로 외곽을 두르고, 내부에 향로로 추정되는 공양구를 중심으로 5구의 보살상과 가릉빈가가 경의를 표하는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석상의 가운데는 방형의 공양단 위에 좌우로 작은 향로를 배치해 놓고 있으며 중앙에는 그 보다 큰 향로가 세로로 길게 드리워진 천(탁의卓衣) 위에 놓여 있다.부처님 앞에 항을 공양하는 의식으로 추정된다.

뒷면은 앞면과 형태와 거의 같지만 가릉빈가의 자리에 꽃이 조각돼 있으며, 공양단의 중앙향로 좌우에 촛대가 배치돼 있고 특히 중앙의 향로 위로 구름무늬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후 2011년 금장대지 발굴조사 당시 사리공양석 2점이 더 추가 발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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