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하나로 먹고 살고, 이웃 돕고 참 좋아요"

지난 15일 예닐곱 평쯤 될까한 포항시 남구 상대동 성동이용소에는 하루종일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열명 남짓이 이용소안을 꽉 채우면서 건물 입구쪽 나란히 놓여진 소파 셋도 모자라 플라스틱 의자까지 꺼내 엉덩이를 붙인 이들도 있다.

사람들이 끊이지 않다보니 해묵은 스피커속에서 흘러나오는 가수 박인희의 노래조차 잡담소리에 묻혀갔다.

가위를 든 전웅용(58)씨는 말수가 적었다.

'어떻게 잘라드릴까요'라고 묻지도 않았고, 손님들 또한 별 말 없이 그에게 머리를 맡길 따름이었다.

그가 하는 손님들에게 하는 말은 '오셨는교' '다 됐심더''가시데이' 정도가 거의 전부였다.

면도와 머리감기를 맡은 아내 전영숙(46)씨가 간간이 '안내' 수준의 말을 주고 받았다.

황혼기에 접어든 손님들이 까탈스레 주문하는 경우도 드물겠지만 전씨의 적은 말수가 피로나 무뚝뚝함에서 비롯한 게 아님을 모두들 알고 있기에 '편안한 고요'라는 표현이 알맞는 분위기였다.

다른 이용소의 반값 수준이란 사실, 사십년 넘게 가위를 잡아온 전씨의 솜씨와 수십 년째 봉사 활동을 펼쳐온 그의 선행까지도 속속들이 알기에 따로 뭐라 요구할 사항도 없는 듯 했다.

"노인네들 헐거운 주머니 헤아려주는 사장님이니까요."

제법 멀리 지곡동에서 온다는 김세웅(65)씨는 1년전 친구의 소개로 처음 들른 후 이제 주변에 싸고 잘 깎고 좋은 사람이라서 소개하는 홍보대사가 됐단다.

십년도 훌쩍 넘는 단골부터 몇 달전부터 찾기 시작했다는 손님까지 공히 비슷한 대답이 돌아온다.
▲ 전웅용씨가 주로 쓰는 가위는 30년도 더 된 것들이다.

성동이용소는 이발이건 염색이건 5천원만 받는다.

면도만 하면 4천원이다.

염색 1만원, 이발 1만 2천원이 보통인 다른 가게에 비해 절반도 안되는 셈이다.

지난 2012년에 '착한가격업소'로 선정됐지만 전씨가 이용사협회의 종용을 물리쳐가면서 저렴한 가격을 고집한 지는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손님들은 솜씨 좋은 그가 이처럼 저렴한 가격을 받는 데에 대해 얼마간의 미안함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그같은 손님들의 미안함에 손사래를 친다.

"그냥도 깎아주는 데 5천원이면 적당합니다."

그런 덕분일까.

이른 시각, 가게 문을 여는 아침 7시20분 이전에 이미 7~8명은 줄을 서서 전씨 내외를 기다린다.

여름이면 10명~12명이 보통이라고.

손님이 빗자루를 들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담거나 허름하던 가격표를 떼버리고 워드프로세서로 깔끔하게 만들어 다시 붙여주는 일이 어색하지 않은 곳이 전씨의 이용소였다.

전씨는 무학이었다.

국민학교도 채 다니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뜨셨고, 4남매는 단칸방에 살았다.

행상일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의 고생을 덜기 위해 다른 수가 없었다.

장남이었던 그는 11살 무렵부터 생업에 뛰어들었다.

목공소에서 잡일을 하던 전씨를 눈여겨 본 이발소 주인이 "힘든 일하지 말고 머리 깎는 거 배워라"고 불렀다.

1970년대 초입. 경주 성건동의 이발소였다.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허드렛일만 하며 1년을 보낸 뒤 여기 저기 옮겨 다녔지만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해진 날짜도 없이 쥐어주는 대로 보수를 받았으나 그마저 넉넉하지 않았다.

라면 한 봉지가 2~30원하던 시절, 한 달 꼬박 일한 품삯이 2천원 가량이었다.

머리감기 3년을 거치고 면도에 2년을 꼬박 바치면서 예닐곱군데를 옮겨 다닌 끝에야 처음으로 가위를 잡았다.

열일곱인가 열여덟인가, 대구 성당동의 이발소였다.

가위를 잡았다해도 처우는 달라질 게 없었다.

실력도 모자랐고 연습도 필요했다.

전씨는 쉬는 날 가위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포항·경주·대구·울산을 가리지 않았고, 노인정·마을회관·당산나무 아래 등을 누볐다.

어디든 사람들이 모이는 데는 모두 찾아가 말씀드렸다.

머리를 깎아드리겠노라고.

"주로 할아버지들이 반겨주시고 머리를 맡기셨죠. 아버지가 안 계셨던 탓인지 다 아버지 같아 또 좋았고."

전씨의 이 당차고도 영민한 행동은 살기 위한 전략이었지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봉사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용사 면허를 딴 1978년 12월 이후로도 쉬는 날이면, 아니 이용소가 문을 닫는 날이면 이용소가 아닌 곳에서 가위질을 멈추지 않았다.

경험이나 실력을 쌓기 위한 시간이라면 차고 넘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는 지금도 노인정·복지회관·나환자촌·장애인 시설·요양병원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경주와 울산과 대구와 포항을 오가며 목욕탕 한 켠과 아파트 상가를 거쳐 군부대 안 이발소로 출근하다 지금의 성동이용소에 자리하기까지 강산이 세 번 넘게 바뀌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용소를 차렸다가 다시 종업원 생활을 해야 했던 80년대를 지나 서점 직원이던 지금의 아내를 중매로 만나 결혼하던 90년대 말엽을 거쳐 딸아이가 자라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 타지로 떠나야 하는 지금까지도 그는 잊지 않았다.

몸이 불편한 이들을 찾아가 말을 건네는 일, 머리를 깎아드리겠노라고.

약빠른 처세술을 성공으로 떠받드는 기이한 세상도 그의 오랜 선행을 알아볼 눈은 있었다.
▲ 성동이용소는 늘 만원이다. 싸고 잘 깎고 좋은 분들이라서. 손님들이 즐겨찾는 이유는 한결같다.

지난 1991년 포항시 우창동장 공로패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서른 개 가까운 감사패며 표창장 등을 그에게 건넸다.

동장·노인회장을 비롯해 시장·도지사·장관도 여러 번 겹치는 리스트는 지난해 12월 '국민추천포상'의 대통령 표창으로 정점을 찍었다.

국민추천포상제는 국민이 공로자를 직접 추천해 정부가 포상하는 제도로 전씨가 받은 대통령 표창은 그 대상격이다.

그런 그가 봉사 횟수를 많이 줄였다.

매주 화요일이면 요양병원과 장애인 단체 등 네 곳을 차례로 찾아가던 전씨였으나 요즘은 셋째 주 화요일만 나선다.

지난 2014년 9월, 요양병원에서 머리를 깎던 한 할머니가 거칠게 움직인 탓에 오른쪽 팔꿈치를 다쳤기 때문이다.

마비가 와서 6일간 병원에 드러누웠다.

팔을 다친 전씨에게 의사는 장시간 과도한 업무로 인한 목디스크 증상도 있다고 말했다.

10년도 더 이전에 담배도 끊었고, 가끔 반주 삼는 막걸리도 딱 1병만 마시던 건강한 그였다.

그러나 이제는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떨어트릴만큼 손에 힘이 없다.

진통제 따위가 포함된 약도 챙긴다.

봉사 중 사고와 후유증은 뭐라 불러야 할까?

병원비와 약값의 출처 따위를 묻는 질문에 그는 그저 허허 웃는다.

그런데도 몸이 낫는대로 다시 봉사하러 가기만을 바란다고 말한다.

"새벽 대여섯시만 되면 커피를 끓여 준비해놓고 기다리시는 어르신들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눈에 선한데…"

그는 차가 없다.

자가용 승용차를 가져본 적도 없고, 면허도 없다.

늘 새벽 4시30분이면 일어나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고 한다.

병원이나 장애인 시설을 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30년도 넘게 쓴 가위 몇을 챙겨 새벽 어스름 첫 차에 몸을 싣는다.

열 몇이던 때부터 쉰하고도 여덟인 지금까지도.

하루 동안 이용실에서 상대하는 사람은 30명 남짓이지만 자원봉사에서 만나는 이들은 어림잡아 70~80명에 이른다.

100명을 넘길 때도 비일비재하다.

일주일 단 하루인 휴일을 반납하고 더 고단한 곳으로 가지 못해 아쉽다는 전씨가 '열정'과 '욕심'이란 단어를 쓴 것은 봉사 얘기를 할 때만이었다.

여전히 월세로 있는 이용소 얘기에는 시큰둥했다.

"배운 기술로 먹고 살아왔고 거기에 이웃들까지 도울 수 있어서 이 직업이 참 좋구나, 항상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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