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여년 전 수많은 후학 양성했던 유학의 터전

▲ 윤별동묘.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현대사회에 귀감이 되는 일화 '거위와 구슬 '의 주인공이 예천의 조선시대 초 대학자 별동(別洞) 윤상(尹祥·1373~1455)이다.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는 별동 윤상이 벼슬에서 물러나 터를 잡은 곳으로, 현재 예천윤씨의 집성촌이다.

예천윤씨(醴泉尹氏)는 예천을 고향으로 하는 토성으로 시조는 고려조에 추밀부사(樞密府使)를 지내고 예빈시소윤(禮賓寺少尹)에 추증된 윤충(尹忠)이다.

문헌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없으나 그 후손들이 여러 대에 걸쳐 예천에 세거하면서 윤충을 시조로 하고 있다. 현재 종가가 남아 있으나, 종손은 현재 충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8일 별동선생의 제사를 모셔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예천은 조선시대 유학의 태동지이다. 조선 초기부터 이곳은 정몽주의 수제자이자 조선시대 대제학을 지낸 송정(松亭) 조용(趙庸·~1424)이 있었으며, 이들의 제자 대제학을 지낸 별동이 후학을 양성했던 유학의 태동지이며 모태지였다.

예천군수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어릴 적 이곳에 머물렀던 다산 정약용은 예천을 일러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했다. 이는 예천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고향처럼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했던 곳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별동은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별동은 출생부터 신이한 존재로 기록된다. '예천군지'에 따르면, 별동의 아버지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옛 무덤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아버지는 무덤 주인이 학 한 마리를 주고 떠나는 태몽을 꾼 후 별동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더구나 학은 조선조 문인의 흉배에 수놓아져 있는 것으로, 별동은 문인으로서 대성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별동 윤상은 이름은 철(哲), 자 실부(實夫), 호 별동(別洞) 선(善)의 아들로 태어났다. 별동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혜하고 명민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8∼9세 때부터 별동은 향리의 일을 맡아 보면서 관솔불을 모아 밤늦게까지 글 읽기를 하는 등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초기 역성혁명을 반대해 유배 온 조용이 그의 명민함을 눈여겨보고 그를 제자로 삼았으며, 이때 사서육경과 성리서를 연구함으로써 별동의 학문적 기초가 정립됐다.

별동은 태조 1년(1392) 진사, 이듬해 생원이 되고 태조 5년(1396) 식년문과에 급제해 상주·선산의 교수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사예(司藝)가 됐고, 늙은 부모를 위해 외직을 청하여 금산, 영주, 대구 등지에 수령을 역임한 후 대사성에 뽑히어 16년이나 성균관의 장으로 지냈다.

특히 그는 세종 30년(1448)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서 성균관박사가 돼 단종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당시 경학삼김이라 하는 김구, 김말(金末), 김반(金泮) 등에 비해 더욱 뛰어났으므로 모든 선비들이 다투어서 그에게 배우기를 청했다.

오랫동안 교수로 있으면서 현관(顯官) 명사(名士)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돼 조선 개국 이래 으뜸가는 사범(師範)이라 불려졌다.

문종 원년(1451) 치사(致仕)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특별이 임금이 예천군수로 하여금 달마다 음식물을 바치게 했다. 그의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지금은 훼철된 예천의 향현사(鄕賢祠)에 모셔졌다.

이러한 별동의 유지는 오랫동안 고을의 풍습으로 이어져 수많은 문과급제자를 배출해 내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특히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전국의 문과급제자는 9천30명으로 파악되는데, 예천(84명) 및 용궁(36명)은 120명으로 전국 9번째로 많은 문과급제자를 배출하는 등 유학의 고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이러한 학풍은 인근 안동·영주에 이어져 조선 초 유학을 전파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초기 별동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기록이 남아있다.

별동은 나이를 핑계로 사직하기를 청하자, 당시 도승지 조서강은 임금에게 "윤상은 나이가 많으나 학문이 자세하고 밝으며, 덕행까지 모범이 되어 따르는 제자들이 많으며, 사직을 허락하면 많은 제자들이 실망할까 두렵다"고 하였다. 더구나 별동은 역경(易經)과 시문이 뛰어나고 제자들에게 하나하나 자상하게 사람들을 가르쳐 주며, 종일토록 바르게 앉아있어도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아 뛰어난 교수로 칭송받았다.

이로 인해 후대의 유학자인 서거정은 "윤상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학문이 매우 정밀하면서도 자세하게 분석하니 국조 이래로 스승이 될 만한 유학자로서는 최고였다"라고 하였고, 퇴계 이황은 중국사신의 방문시 "동방에도 공자의 심학(心學)과 기자의 주수(疇數)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우탁,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윤상, 이언적, 서경덕 7인을 거론했을 정도로 뛰어난 스승이었다고 했다.





△윤별동묘

현재 예천군 미호리에는 윤상을 제향하는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1456년)이 시도유형문화재 제293호로 지정돼 있다. 이 사당에는 별동 윤상과 그의 부인 정부인(貞夫人) 안동(安東) 전씨(全氏)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8일 예천윤씨 종가에서 제사가 이뤄진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서 낮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막돌초석 위 어칸에는 둥근기둥을, 양쪽 칸에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또 어칸은 창방을 높이고 양쪽 칸은 창방을 낮게 처리했으며, 어칸에만 두 짝의 열 개 문을 달고 양쪽 칸에는 빛이 통과할 수 있는 광창만 두는 오래된 구성법을 보이고 있어 사당 건축에서는 흔하지 않은 구조와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한 사당 내에는 별동집 목판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에는 안동 국학진흥원에 옮겨 보관되고 있으며, 이 자료는 2015년 유교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더구나 미호리 동쪽 등성이에 있는 청심대(淸心台)는 별동이 내성천의 맑은 물과 미호리의 산수를 통해 정신적 휴양과 제자양성을 했던 곳으로 예천지역의 정신문화를 되새기는 교육의 장이다.

별동 선생의 크나큰 가르침은 600년이 흐른 지금까지 일화를 통해 초등학생의 교육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그 일화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고 있는 '거위와 구슬'이라는 이야기이다.



△윤별동 선생의 일화

별동 선생이 길손이 되어 먼 길을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어느 주막에 들게 됐다. 주막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앉았노라니, 주인의 손자인 듯한 대 여섯살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구슬 한 개를 들고 대문 밖을 나가다가 그만 구슬을 손에서 떨어뜨리자, 그때 마침 아이의 옆에서 먹이를 찾던 거위가 구슬을 먹이인 줄 알고 널름 집어 삼키고 말았다. 한참 후 주인집은 별동 선생을 의심하며 밧줄로 꽁꽁 묶어서 관가에 끌고 가려 하였다. 그때 별동은 태연한 자세로 저기 있는 거위를 멀리 못 가도록 묶어 나와 같이 있게 하면 내일 아침이면 구슬을 틀림없이 찾을 것이라 주인에게 사정했다. 반신반의였으나 그렇게 하여 보자고 하면서, 별동이 밤새 달아날까 싶어 기둥에 꽁꽁 묶어 동여 놓고 그 옆에 노끈에 다리가 묶인 거위를 함께 매어 놓고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이튿날, 별동 옆에 다리가 묶인 거위는 똥을 누게 되었고, 별동은 주인에게 거위의 똥 속에서 구슬을 찾으라고 하였다.

구슬을 찾은 주인은 백배 사과하는 한편, 거위가 구슬을 먹은 줄 알면서 왜 말을 하지 않고서 밤새도록 묶여서 고생하였느냐고 물었더니 "구슬을 당장 찾기 위해 거위를 죽였을 것이니, 내가 하룻밤만 고생하면 구슬도 찾고, 거위도 죽이지 않을 것이 아니요."하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렇듯 별동은 침착성과 참을성, 그리고 생명을 소중히 여겼던 인물로서 지금까지도 큰 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예천군청 이재완 학예사는 "별동의 학문은 조선 초 유학적 이론을 형성하는 교두보가 되었고, 말년 예천에서의 제자양성은 예천을 비롯한 경북 북부지역이 유학의 고장으로 발전하는 데 큰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예천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 별동 선생의 정신은 지금의 예천을 있게 한 '예천의 혼'의 뿌리로서 새천년 신도청 소재지로서의 정신문화를 다시 꽃피울 수 있도록 재평가되어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만 기자
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경북도청, 경북경찰청, 안동, 예천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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