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떠난지 천여년 도처에 아름다운 이야기 전해져 명예, 금수저 넘어섰지 않나

▲ 김진태 전 검찰총장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가을바람에 외로운 한숨소리)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세상에 알아주는 이 적네)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밤은 깊은데 창밖에 비는 내리고)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등불 앞 고향 그리는 아득한 마음이여)


이 시는 그가 당나라 현위 시절에 지은 것으로 현실에서의 자기 소외감, 자기 고독감을 집약하여 표현한 절창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음에 품어 온 포부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불우한 생애와 탈속의 염원 속에서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세속에 대한 미련, 비 내리는 가을밤과 같은 쓸쓸한 현실과 늘 꿈꾸어 온 만리밖의 이상향을 그리는 마음 등이 압축되고 정제된 언어로 잘 나타나 있다.



신라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의 시'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고운은 신라 6두품 출신으로 12세에 당나라에 유학,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했다. 황소의 난 토벌에 종사관으로 참여하여 작성한 격황소서(檄黃巢書)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고국으로 귀국했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당이나 신라 모두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신세를 한탄하면서 여러 지역을 유람하다가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감으로써 그의 해적이를 마감했다.

스스로는 '유문말학(儒門末學')이라고 겸양하면서 유학자로 자처했지만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이해가 있어 이른바 유·불·선 등 삼학에 회통했으며 조선 후반기의 북학(北學)사상이나, 최제우의 동학(東學)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미 생존시에 당나라 문인들로부터 시선 이백(李白)과 비교되었고, 귀국한 뒤에는 신라의 왕 등으로부터 국사(國士)로 대우받았으며 그의 작품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었다. 더 나아가 고려 현종대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설총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어 우리 나라의 유종(儒宗)으로 받들어졌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그 역시 후대인들로부터 끊임없는 존경과 비판, 긍정과 부정 등 상반된 평가가 이어졌다. 이것 역시 그가 후대에 끼친 영향이 그만큼 크고 계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가 떠난지 천여년이 더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라 도처에 그의 자국과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고, 또 그를 기리는 행사들이 이어지고 있으니 비록 몸은 금수저가 되지 못했지만 명예는 금수저를 넘어선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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