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서 돌아온 한호 임연 여생 보내며 후학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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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영정은 1630년 병자호란에서 돌아온 한호(閑好) 임연이 여생을 보내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배뫼 마을에 지었다. 정자 옆 500년 넘은 팽나무, 푸조나무 등과 몽탄강 푸른 물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배뫼 마을에 있는 식영정(息營亭)은 정자가 있는 풍경의 가장 이상적 가치를 품고 있는 곳이다. '물좋고 정자 좋은 곳'이다. 

정자 옆에는 500년 넘은 팽나무, 푸조나무 8그루가 시립해 있고 앞에는 몽탄강 푸른 물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건축물도 정교하고 수려하다. 전쟁에서 돌아온 정자 건축주가 벼슬을 마치고 여생을 보내며 후학을 양성했다는 점도 정자의 이상적 가치를 더해주는 요소다.

몽탄강은 영산강의 마지막 여울이다. 영산강은 담양의 용추계곡 용소에서 발원해 광주 나주 무안 목포를 지나며 서해로 흘러들어 강으로서의 생명을 마감할 때까지 지역에 따라 남포강, 목포강, 금강, 사호강, 곡강으로 이름을 바꿔 흐른다.

식영정이 앞을 지나는 이 일대는 몽탄강이라고도 하고 S자로 굽이쳐 흐른다고 곡강이라고도 한다.

정자 정면에서 보면 왼쪽으로는 늘어지 마을이 오른쪽으로 상몽탄, 장사리가 펼쳐지는데 강줄기는 식영정을 중심으로 길게 활을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휘어져 흐른다.

대지의 들고 남, 강의 휘어짐에 긴장이 팽팽히 스며들어 시위를 당긴 활을 닮았다. 강은 반도처럼 앞으로 툭 튀어나온 늘어지 마을에서 굽이친 뒤 식영정이 있는 들판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다시 오른쪽 상몽탄 강언덕에 부딪쳐 목포쪽으로 흘러가는데 이 광경이 장관이다.

강건너 편에 메기 대가리처럼 튀어나온 들판은 나주시 봉추면 들녘이다. 물굽이는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있다.  그렇다. 안동 하회마을과 닮았다. 이 장엄하고 수려한 경관 때문에 식영정은 교촌리 유산정, 청계면 화설당과 함께 무안의 3대 정자로 꼽힌다.

▲ 식영정에서 바라본 영산강 전경.
정자는 한호(閑好) 임연이 1630년에 지었다. 임연은 한가로움을 좋아한다는 그의 호대로 이곳에서 여유를 즐기며 시와 학문을 닦았다.

승문원 우승지, 영암군수와 진주목사, 남원 부사를 지낸 그는 벼슬에 물러난 뒤 남은 생을 보낼 퇴후지지를 물색하는데 전력했다. 그는 힘겹게 이곳을 찾아내고 "영산강 연안을 따라 살만한 곳을 찾아 상하를 두루 살펴보다 드디어 사포와 몽탄 사이에 한 오묘한 곳을 얻었으니 자리는 그윽해 기운이 머물렀고 물맛이 좋으며 땅은 비옥해 가히 선비가 살만하다"고 '복거록'에 썼다. 

정자 주인은 여기서 수많은 시인 묵객과 교류했고 그들은 풍광이 빼어난 정자에서 98수의 제영시를 남겼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정자 중앙에 방을 두고 삼면을 마루로 둔 구조다.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어 그 원형을 알 수 없는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통형의 둥근 기둥을 세웠다.

가구 형식은 2고주5량 구조이며 종도리와 주심도리는 굴도리로, 중도리는 납도리다. 마루는 판대공이다. 중앙의 마루방 3면에는 사분합문을 들쇠에 매어달게 돼 있으며 후면 벽에는 다락이 가설되어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지붕의 네 귀는 활주로 받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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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점은 식영정 현판 앞에 '어약연비'라는 현판을 하나 더 달아 둔 것이다. '식영(息影)'은 본래 '세상을 멀리한 음지에서 행적을 지우고 심신을 수양하면서 인간 본성을 지킨다'는 뜻이다. 담양의 식영정이 그렇고 고려시대 승려시인도 식영암도 그렇다.

무안의 식영정은 그림자 '영(影)' 대신 경영할 '영(營)'을 썼다. '진영', '병영'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군대라는 뜻도 담고 있다.

임연이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명을 받아 남한산성 방어에 참여했다가 돌아와 이곳에 정자를 지었으므로 전쟁(병영)을 끝내고 쉰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막연히 쉬는 것이 아니라 편안히 쉬면서 국가 미래를 위해 인재를 경영을 한다는 뜻이다. '어약연비(魚躍鳶飛)'는 '시경'에 나온다. 물고기가 펄펄 뛰고 솔개가 하늘을 높이 난다는 뜻으로, 모든 사물이 제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삶을 영위한다는 말이다.

▲ 영산상 제2경 몽탄노적(夢灘蘆笛, 꿈여울에 울려퍼지는 갈대피리 소리) 표지석.
정자 앞마당에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영산강 몽탄나루다. 몽탄은 꿈여울이라는 뜻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강건너 나주에 진을 치고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다 쫒겨  퇴각하던 중 물이 범람한 영산강에 가로 막혀 죽을 위기에 처했다. 전투에도 밤은 온다. 잠깐 눈을 붙인 왕건의 꿈 속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한다. 따라가보니 물이 빠지고 있었다. 황급히 강을 건넌 왕건은 개울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뒤늦게 쫓아온 견훤군을 격파한다. 그 강이 몽탄(夢灘)이고, 그 개울이 파군천(破軍川)이다. 모세에게 '홍해의 기적'이 있다면 왕건에게는 '꿈여울'의 기적이 있었고 그 기적의 강이 식영정 발아래 도도히 흐르고 있다.

식영정이 있는 언덕을 내려오면 몽산나루터이다. 영산강 8경 중 2경 '몽탄노적'이다. 굳이 풀어보자면 꿈여울에 들리는 갈대피리소리이다.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여기는 강가에 핀 갈대의 합창이 피리소리처럼 들리는 곳이다. 천년 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흔적을 갈대피리소리로 '세탁'했다. 갈대밭에 길게 깔아둔 나무데크 길을 걸으면 정말 갈대하나 꺾어들고 피리를 불고 싶어진다.

몽탄의 낙조는 이름그대로 꿈인듯 황홀하다. 바다를 앞두고 강으로서의 생명을 다하는 마지막 여울이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더 붉고 더 절절했을 것이다. 식영정을 지었던 한호 임연이 정자에서 핏빛으로 물드는 몽탄의 노을을 바라보는 심정을 어땠을까. 병자호란의 치욕, 도탄에 빠진 민생, 무능한 관료,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부끄러움 때문에 몸을 떨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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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의 사당.
□ 가볼만한 곳 - '표해록' 최부의 묘

정자 왼쪽에 멀리 팔을 뻗어놓은 것처럼 툭 튀어나온 땅이 '늘어지 마을'이다. 튀어나온 지형에 막혀 강물의 유속이 느려져 '늘어지'라고 했단다. 하늘에서 보면 한반도의 지형을 꼭 닮았다고 한다.

식영정에서 차로 5분거리에 있다. 길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마을이 나오고 마을 입구에 정자가 있다. 정자 앞에 마을 표지석이 있는데 그 맞은편 길건너에 '표해록'의 저자 최부의 사당과 묘가 있다. 묘는 언덕빼기에 있는데 멀리 몽탄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좋은 곳이다.

최부는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김종직의 제자다. 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으로 표류하다 중국에 도착해 돌아온 인물이다.

중국에서 수차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와 뒷날 충청도 가뭄해소에 큰 도움을 주었으나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참형을 당했다.

'표해록'은 최부가 제주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하다 중국 절강에 도착한 뒤 항주 소주 양주 산동 북경을 거쳐 효종 황제를 알현하고 한양에 도착하기까지 6개월간의 기록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예닌스님 '입당구법서'와 함께 세계 3대 중국여행서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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