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미모 겸비한 황진이 협객 풍모·예술적 재능도 지녀

▲ 김진태 전 검찰총장

月下庭梧盡(월하정오진·달빛 아래 정원의 오동잎은 이미 졌는데)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서리 속의 들국화는 아직도 누렇네)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누각은 높이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흐르는 물은 거문고 소리에 어울려도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매화는 피리소리에 들어 향기를 풍기네)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내일 아침 서로 이별하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조선 황진이의 시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이다. 소세양이 던진 '유(榴)'에 '어(漁)'로 화답함으로써 의중(意中)이 계합하고 정화(情火)가 상교하여 가연을 맺은 후 소세양이 30일만에 떠나려 하자 이 시로써 그의 발길을 되돌렸다.

홀수 연은 소세양, 짝수 연은 자신을 빗댄 것으로 비천한 자신의 사랑이 고귀한 소세양의 그것보다 더 순수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벼슬도 아니고, 이름도 아니며, 오직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황진이는 성격이 활달하고 학문적 기지를 겸비하여 선비들과 어깨를 겨루고 대화하며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빼어난 미모에 협객의 풍모마저 있은 데다가 가무 등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스스로 홍곡(鴻鵠)이다 라고 생각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연작(燕雀)에 불과한 이들마저 자신의 처지는 망각한 채 불나방처럼 그녀의 치마폭으로 달려 들었으니….

이 멋진 여인을 그리는 정은 후대에도 면면히 이어져 백사 이항복에 이르러서는 눈오는 절대 고요한 밤에 이 여인의 비단치마 흘러내리는 소리로 남았고, 이것 또한 근년의 김광균에까지 전해져 그의 시 '설야(雪野)'에 옷벗는 소리로 내려 앉았다.

임제(林悌)가 평안도사가 되어 부임하는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청초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로 시작되는 시조를 지은 일화는 세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고 이 일 때문에 백호의 신상문제로 번졌으니… 참으로 일향백대전(一香百代伝)이다.

글자 유희 같은 소세양과 황진이의 사랑카드 '유(榴)'와 '어(漁)'를 풀이해 본다.

먼저 소세양이 내민 유(榴)는 석류나무 유니, 즉 석유나무유(碩儒那無遊)이고, 황진이가 답한 어(漁)는 고기잡을 어니, 즉 고기자불어(高妓自不語)이다. 그러니, 해석하면 (나는) 대유(大儒)아니니, 안놀래. (너가 大儒라면 나는) 큰 기생이다. 어찌 스스로 말하리.

이쯤 되어야 천하를 농락할 수 있지 않겠는가.

참고로 이 시의 첫구의 '정오(庭梧)'를 '오동(梧桐)'으로 표기한 곳도 있지만 다음 줄의 '야국(野菊)'과의 대구관계로 보면 '庭梧'가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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