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년 세월 오롯이 조상의 발자취 보존·자손 보호 매진

▲ 경북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의 영주 장말손 종택.
오랜 세월 동안 선조들이 살아온 고택을 지켜오면서 선조의 뜻과 정신을 이어오고 있는 영주의 인동장씨의 후손. 영주에서는 유일하게 450여년을 12대가 살아온 인동장씨 연복군종택은 장덕필 종손 부부가 지금까지 선조들의 유물과 유적, 사당 등을 관리하면서 생활하고 있어 종친들의 화합과 결속을 다지는데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장말손 종가는 영주 인터체인지에서 장수면 방향으로 내려서면 바로 영주도로공사 표지판을 볼 수 있다. 그 진입로에 경상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98호 '장말손유물각'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듯한 자연경관이 펼쳐지면서 몇 가구 안 되는 집들이 고풍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장말손 유물각이자 연복군 인동장씨 종택이다.

인동장씨는 조선 세조 때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올랐던 안양공 송설헌 장말손(張末孫·1431~1486)의 후예다. 영주의 입향조는 장응신(張應臣·1490~1554)으로 초곡에 터를 잡은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의 사위가 되면서부터다. 큰집인 화기리와 전계, 금강, 용강, 순흥 등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형성해 세거하고 있고 응신의 혼인을 계기로 자리한 후 많은 문인과 학자들을 배출했다.
▲ 정덕필 종손.

대표적 인물인 응신의 아들 장수희(張壽禧·1516-1586)는 퇴계의 첫 제자이다. 퇴계가 영주 초곡의 허씨 집안에 장가를 들었을 당시 장수희의 나이는 6살로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책을 가지고 수업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1547년 소수서원에 입원 수학했으며 이산서원 창건의 주된 역할을 했고 그 일을 주관하는 12년 동안에 규모를 키우고 재정을 넉넉히 했다.

음직으로 어모장군을 지냈으며 사후에 형조참의로 추증돼 영주 한천서원에 배향됐다.

인동장씨 16세 장덕필(67) 종손은 "장응신 선조의 맏아들인 장윤희 선조는 '조상을 보존하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는 터전을 찾아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현 화기리에 자리했다"며 "현손인 장언상 선조부터 12대를 이어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곳에서 선조들의 뜻과 정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450여년의 세월을 한 곳에서 지켜 내려온 인동장씨 종택에는 선조들의 유물, 유적과 근대의 물건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이중 인동장씨 직계 학공파 시조인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직제학공에게 내린 합격증서인 고려 홍패는 보물 501호로 지정되고 조선 단종 1년과 세조 5년에 연복군에게 내려진 백패와 홍패도 보존되고 있어 과거제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종택의 오른쪽 유물각에는 서간문, 과거시험을 위한 백과사전, 송사문서, 주역 등과 현판, 기문, 비문 등은 탁본을 떠 보관하고 있다. 유물각 왼쪽에는 영정각이 있고 그 안에 성종 20년인 1489년 하사한 연복군 안양공의 영정이 보물 502호로 자리하고 있다.

현재 종택에는 보물 5점(5종 28점)이 있다. 고려·조선 초의 고문서(도지정문화재 227호) 등 700~800년 이상 된 귀중한 유물이 100년을 간격으로 보관되고 있고 최근에도 200년이 넘은 호구단자가 발견된 바 있다.

특히 지난 6.25동란 당시 종택이 인민군 본부로 사용됐다고 한다. 인민군이 종가의 유물중 패도를 탐을내 가져가려고 땅속에 묻어두었다. 그러나 갑자기 후퇴하는 바람에 땅속에 묻어둔 패도를 미쳐 챙기지 못하고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패도가 어디에 묻혔는지를 알수없는 점이었다. 집안의 귀한 보물을 잃어버렸다는 점 때문에 종손의 부친께서 마음의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27년후에 패도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부친께서 추원사 건립문제로 걱정하고 계셨는데 부친의 꿈에 연복군 어른이 현몽해서 패도가 있는 위치를 알려줘서 귀한 보물 패도를 찾을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아마도 선조께서 부친의 간절한 심정을 읽었던 때문인게 아닐까. 그러나 패도를 다시 찾기는 했지만 땅속에 오래 묻혀있던 탓에 칼집의 일부가 부식돼 당초의 원형이 훼손된 것이 아쉽다고 했다.

종택의 정자인 송설헌은 꽃계마을 뒤편 나즈막한 야산 산록에 터를 잡고 전방의 꽃계들과 마주하고 있다. 이 정자의 기문(記文)은 봉화 닭실의 권세연(1836~1899)이 썼다. 또한 지평(持平)은 김흥락(1827~1899)의 이건기가 있다.

종손 장덕필씨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예들을 깨뜨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3년 시묘는 못했지만,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산소를 찾았다. 산소를 찾을 때는 굴건제복을 갖춰 입고 하루종일 산소에 머물렀다고 한다.

전통에 대한 종손의 생각은 그대로 자식들에 대한 교육으로 이어진다.
▲ 보물 제502호 장말손 영정.

그는 차종부가 될 맏며느리를 맞을 때 시집 오기 전 먼저 시댁을 방문토록 했다. 그 자리에서 종가의 예법이나 해야 할 일을 설명하면서 종가에 올 때는 반드시 치마저고리를 입도록 당부했다는 것이다.

종가의 살림살이를 거의 혼자 힘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다시피 한 종손에게는 근검함이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이 사랑채에서 종손은 그의 손자가 3살이 될 때까지 함께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종손의 대를 이어야 할 아이니 예절교육을 시켜야겠다 싶어 처음에는 손자를 데리고 있었지만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것도 그러려니와, 요즘 아이들 교육을 시키려면 시골에서 제대로 시킬 수 있겠습니까"라며 결국 서울로 올려보냈고 한다. 그렇지만 대신 서울에서도 일주일에 한번씩 꼭 전화로 종손교육을 시켰으며 올해 손자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했다고 전했다.
▲ 종가의 중요유물인 패도.

불천위를 모시며 끈끈하고 변함없이 보존되는 연복군 종택. 이 종택을 지키는 종손은 선조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 전통을 고수하고 종손으로서의 소임에 열심인 그를 보며 종손은 종가가 특별히 내린 제목이 아닌가 싶다. 종가를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조상 섬기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종손을 숙명으로 느낀다는 말에서 큰 자긍심을 엿볼 수 있다.
권진한 기자
권진한 기자 jinhan@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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