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세상사 피해 복사꽃 가득한 무릉도원 주인이 되다

▲ 침수정은 동대산과 팔각산의 계곡물이 합류하는 지점, 기암괴석 위에 세워져 천하의 절경을 관조하는 즐거움이 있다.
복사꽃 흐드러지는 무릉도원에 진경산수화가 펼쳐지다.

세상사 훌훌 던져버리고 호랑이 사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정자를 짓고 바람과 달, 구름과 물의 주인이 된 조선의 선비, 손성을을 만나러 간다. '발탁되면 행하고 버리면 숨는' (논어 술이편)이치다.

영덕 침수정으로 가는 길, 주응리와 흥계리를 거쳐 강을 끼고 가는 옥계계곡은 길가에 산수유가 한창이다. 깎아지른 절벽과 기암의 행렬이 이어지다가 길이 강에서 조금 멀어졌다 싶으면 유격의 공간을 어김없이 산수유가 채우고 있다. 눈길을 끄는 건 복숭아밭이다. 키 작은 복숭아나무가 길 양쪽으로 꽃눈을 주렁주렁 달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 4월 중순이면 복사꽃이 제 몸을 활짝 열어 봄바람에 흩날릴 테고 사람들은 계곡에 떠내려오는 복사꽃잎을 보면서 '별유천지비인간' 이백의 시를 읊으며 무릉도원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이 계곡은 곧 복사꽃 천지가 된다. 복사꽃은 그러므로 이 계곡의 미래권력이다. 올해도 4월 중순에 '영덕복사꽃큰잔치'가 열린다.

침수정은 동대산과 팔각산의 계곡물이 합류하는 지점, 기암괴석 위에 세워진 정자다. 포항 하옥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청송 주왕산에서 발원해 팔각산을 거쳐 오는 계곡이 합류하는 영어 'Y'자 지점, 삼거리의 가운데서 살짝 비켜서 있다. 물의 흐름을 관조하는 언덕에 서 있다. 침수정에서 만나 한 몸이 된 물은 옥계로 족보를 바꿔 흐르다 여기저기 50여개 계곡물과 합쳐 오십천이 되고 오십천은 강구 앞바다로 흘러 든다. 오십천에는 은어가 유명하고, 강구항에는 영덕대게 식당촌이 성업 중이다.
▲ 침수정에서 내다본 풍경. 왼쪽이 향로봉, 오른쪽이 촛대봉이다.

침수정은 정면 두칸, 측면 두칸 규모의 아담한 정자다. 뒤쪽 두 칸은 방이고 앞쪽 두 칸은 바위 위에 기둥을 세운 누마루다. 누마루를 돌아가면서 계자난간을 설치해 운치를 더 했다. 정자는 깎아지른 바위 위에 세워져 있고 바위 앞에는 청자빛 계곡물이 흐른다. 물을 건너면 또 작은 바위산과 물이 첩첩이 겹쳐져 있다. 정자에 앉아서 앞을 내다보면 한 폭의 진경산수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옥계 37경 중 일부를 보고 있다. 눈앞에 우뚝한 수직 바위는 향로봉이다. 그 옆에 작은 바위는 촛대봉. 촛대를 닮았다. 오른쪽에 병풍처럼 펼쳐지는 수직절벽은 병풍암이다.

손성을은 광해군때 경주 양동에서 번다한 세상일을 피하며 살려고 이곳에 들어온 뒤 병풍암 가운데 벼랑에 '산수주인 손성을(山水主人 孫星乙)'이라는 암각서를 새겨 놓고 구름과 물, 샘과 돌, 산과 골짜기 '옥계 37경'의 주인이 됐다. 정자에 앉아 가만히 오른쪽 바위벽을 들여다보면 붉은 글씨의 암각서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병풍암 오른쪽에 장대한 소나무가 두어 그루 서 있고 깎아지른 절벽이 옥계 1교까지 이어지는데 그곳이 학소대다. 정자에 앉아 거문고를 켜면 학이 거기로 날아와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정자 정면 향로봉을 살짝 왼쪽으로 비켜보면 하옥으로 가는 계곡 상류 저 멀리 둥근 바위가 보이는데 구슬바위다. 삼층대는 구슬 바위 옆으로 세 개의 산봉우리가 층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로 아래 짙푸른 에메랄드빛 물이 깊은 웅덩이는 '구정담'이고 상류에 있는 울퉁불퉁한 바위 사이를 흐르는 웅덩이는 선녀가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이다. 선녀탕 옆을 흐르는 폭포는 바위 위를 급하고 격하게 흐르고 떨어져 귀가 아플 정도로 소란스럽지만 그 때문에 더없이 상쾌하다.

침수정은 '침류수석(枕流漱石)'에서 나왔다. '흐르는 물을 베개 삼고 돌로 양치질을 한다'라는 뜻이다. 손성을은 이곳에서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으며 세상의 명리를 허공에 떠다니는 뜬구름으로 여겼다. 정자에 앉아 천변만화하는 자연의 변화와 섭리를 몸으로 느끼며 운수(雲水)와 천석(泉石)의 주인으로 400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덕에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아름다운 명승지 하나를 얻었다.



□ 침수정

정자 이름과 경승지 명칭만 놓고 봐도 '고문진보'와 '조선팔도명승'을 펼쳐 놓고 불러 모은 듯 하다.

침수정의 '침수'는 본래는 '돌을 베개 삼고 물로 양치질을 하련다'라는 뜻의 '침석수류'인데 진나라의 손초라는 사람이 친구 왕계에 '침류수석'이라고 잘못 말을 하면서 비롯됐다. 왕제가 말이 잘못됐다고 지적하자 자존심 강한 손초는 "물을 베는 것은 귀를 씻으려 함이요, 돌로 양치질 하는 것은 치아를 갈아서 닦기 위함이다"라고 둘러댔다. 그래서 '침류수석'은 잘못을 엉뚱한 논리로 정당화하려는 궤변을 빗대는 말로도 쓰인다.

▲ 침수정 지붕 위로 보이는 촛대바위.


□ 옥계 37경

4경 천연대의 '천연'은 '시경' '대아편' '솔개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에서 나왔다. 물고기가 뛰는 것이나 솔개가 나는 것은 모두 근본이 같다라는 뜻이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일이 근본에 맞다는 말이다. 강원도 영월군 옥계면에 천연대가 있다. 솔개와 물고기를 따내 '연어'로 쓰기도 한다. 포항 북구 기북면 용계정 계곡 건너편 바위에 '연어대'라는 암각서가 있다.

11경 세심대는 '주역' '계사상전'의 '심중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낸다'에서 나왔다. 안동 유성룡의 옥연서당과 경주 안강 이언적의 옥산서원 계곡에 세심대 암각서가 새겨진 암반이 있다.

12경 탁영암의 '탁영'은 '초사'의 '어부사'에 나오는 구절이다. 보통 '탁영 탁족'으로 쓰인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탁영)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을 것이다"라는 뜻.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지를 표방한 말이다. '맹자'에도 언급되고 있다. 영양 서석지 정원에 '탁영석'이 있고 이황의 도산 경관에도 '탁영담'이 있다. 경주 안강 독락당 근처에 '탁영대'라는 바위가 있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36경 영귀대의 '영귀'는 '논어' '선진'편에 나온다.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쐬고 시를 읊조리면서 돌아오리라(浴乎沂風乎 舞雩詠而歸)"이다. 안빈낙도의 의미로 널리 쓰인다.

조선의 팔도의 경승지 이름은 옥계에 다 모였다. '부벽루'는 대동강 기슭에 있다. 고려때 명신인 이색이 시를 썼을 정도로 유명한 누정이다. 마제석과 계관봉, 옥녀봉, 채약봉 같은 이름도 이미 조선의 경승지에 다 붙여진 이름이다. 손성을의 여행경험이 상당히 축적됐거나 산으로 들어오는 과정에 준비를 많이 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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