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보물 '청렴결백'…대대손손 청백리 정신 잇는 名家

▲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안동 김씨 보백당 묵계종택.

"내 집엔 보물이 없고, 보물이란 오직 청백뿐이다"라는 유훈을 남긴 보백당 김계행 선생(1431~1517년). 그는 일생을 대쪽정신으로 청렴결백하게 살다 간 선비였다.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는 평생 청렴과 강직을 실천했던 보백당의 유훈을 이어받아 대대로 따르고 있는 안동 김씨 묵계종택이 자리 잡고 있다.

△보백당 김계행과 유훈

보백당 김계행 선생은 조선 전기 대사간,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 등 3사의 요직과 성균관 대사성을 거치면서 당대 거유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함께 영남 유림을 이끌며 도덕과 학문으로 덕망을 받아온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불리고 있다. 선생은 후세에 유림들에 의해 묵계서원에 제향됐다.

김계행은 안동이라는 지명이 있게 한 고려건국 공신 삼태사(三太師) 중 한 명인 김선평(金宣平·안동 김씨 시조)의 후예다.

안동은 성리학의 고장, 선비의 고장으로 불린다. 안동지역에 선비문화를 정착시킨 주역은 퇴계 선생이다. 고려 말 안향, 이제현, 우탁 이 이 고장 출신으로 성리학의 토대를 만들었다면 거기에 선비정신이라 부를 만한 고고함과 청백을 심어준 이가 한 세대 앞선 보백당 김계행이다.

김계행은 연산군 시절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피바람이 휘몰아친 두 번의 사화(무오, 갑자)에서 간신히 죽음만 면한 채 안동으로 돌아온 뒤 후학양성에 힘썼다. 오늘날 안동의 선비정신이라 부르는 정신적 토양을 전파하게 된 것이 이때부터다.

그는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0년이나 섬겼던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보백당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1858년, 사림과 문중은 그동안 묻혀있던 보백당의 삶과 학덕을 기리는 포상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려 이조참판(종2품)을 증직 받는다. 종2품 증직으로는 보백당의 공적이 충분히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1859년 다시 1품계 이상의 증직과 시호를 받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조정은 그의 충효와 청백한 인품, 학덕을 인정해 판서의 증직과 시호를 내리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며, 이조판서 증직의 교지와 '정헌(定獻)'이란 시호 교지를 내리게 된다. 그리고 1909년에는 불천위 칙명 교지도 받았다. 불천위 교지는 매우 드문 사례다.

김계행 종가에는 특별한 현판이 내려오고 있다. 보백당의 유훈을 새긴 현판으로 '지신근신 대인충후'와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으로 모두 만휴정에 걸려있다.

'지신근신 대인충후'는 가훈인 '나를 낮추고 타인을 높인다'와도 관련된다. "몸가짐을 삼가고, 남을 대할 때 진실하고 온순하라"는 의미다. 묵계종가에서는 이 현판을 보면서 선조의 뜻을 가슴 속에 새기고 대대로 실천해 오고 있다.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은 "우리 집안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은 오직 청백일 뿐이다."라는 뜻이다. 보백당이라는 당호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 보백당 김계행이 '만년에 휴식을 취할 곳'이란 뜻의 만휴정.


△보백당 종택·묵계서원·만휴정

묵계서원은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 옥고(1382∼1436)를 봉향하는 서원이다. 1687년(숙종 13)에 창건됐다. 옥고는 세종 때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낸 바 있다.

1869년(고종 6)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후에 강당과 문루인 읍청루와 진덕문, 동재 건물 등을 복원했다. 서원 옆에는 후대에 세운 김계행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묵계서원 앞 큰 길을 건너고 강을 건너 골짜기로 숨어들면 만휴정 원림이 나온다. 김계행이 '만년에 휴식을 취할 곳'이라는 뜻으로 자리 잡았다.

묵계의 깊은 산골짜기 송암동 폭포위에 위치한 만휴정은 김계행의 만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곳임에 틀림없다. 이곳 만휴정 동쪽 문과 서쪽 문 위에는 김계행의 유훈이 걸려있다.

보백당종택(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은 6·25전쟁 때 건물 대부분이 불타고 사당과 사랑채 '보백당'만 남았다. 현재의 다른 건물은 그 후에 다시 지었다. '보백당' 건물은 제청으로 사용된다. 불천위 교지는 1909년에 내려왔지만, 그 전부터 불천위 제사는 지냈다는 것이 차종손 김정기씨(1954년생)를 비롯한 후손들의 설명이다.

▲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 옥고를 봉향하는 묵계서원.

△보백당 정신 이어가는 후손들

보백당의 청백정신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족보에 올라 있는 남자들만 따지면 그 후손은 대략 8천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 뇌물 몇 푼 먹어서 교도소에 들어간 후손은 거의 없다는 게 후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특히 공직에 있는 후손들은 '보물유청백'이란 가풍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보백당 문중에서는 선생의 유훈을 받들어 1993년 '보백당장학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매년 후손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아 청렴공무원 자녀와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경북도내에 수백 개의 장학재단이 있지만 청백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장학제도로서는 유일하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 후손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고 타성 받이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다. 장학재단을세워서 자기 문중 자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은 보백당의 정신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 이 사업은 21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 공무원 77명과 356명에게 2억4천여 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보백당의 19대 종손인 김주현(87)씨는 보백당장학재단에는 선생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종손은 경북도 교육감을 2번이나 역임했다. 민선 초대 교육감이기도 하다. 2002년에는 도산서원선비수련원 초대 원장을 맡아 선비문화 알리기에 힘썼다.

"서원을 보존하고 향사를 올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며, 옛 선조의 고결한 정신을 혼탁한 이 시대에 널리 알리는 것이 후손의 의무"라고 종손은 말한다.

지난해 1월에는 경북도청이전지에 신도지 녹지공원 조성을 위해 묵계서원에서 관리하고 있던 수령 22년이 넘은 금강소나무 80그루를 경북개발공사에 기증하기도 했다.

안동김씨 보백당 19대 종손 김주현씨는 지난해 10월 3일 열린 '안동의 날'에 지역인재 육성과 안동지역의 교육기반 확충에 헌신해 온 공을 인정받아 '자랑스러운 시민상'을 수상했다.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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