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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2·28과 광주 5·18

2·28, 비폭력 고교생 운동 5·18, 과격한 시민 항쟁으로 같은 민주화 운동 평가 옳지 못해

김풍삼 소담학당 대표 교육학 박사 등록일 2016년03월20일 22시33분  
▲ 김풍삼 소담학당 대표 교육학 박사
올해로 2·28 대구민주화 운동 56주년을 맞았다. 기념단체 에서는 이 날을 국가기념일로 추진하겠다고 한다. 3·15 와 4·19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이 국가 기념일로 정해졌다면 대구 2·28 은 당연히 국가기념일로 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대구 2·28 민주화운동이 마산 3·15 부정선거 규탄의 촉매가 되었고 그 불길이 서울의 4·19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고귀한 초석(礎石)을 놓은 대구 2·28 은 국가기념일로 정할 뿐만 아니라 한국근대사에 4·19를 서술하기 전 반드시 기록 되어 후학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대구 2·28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929년 일제강점기 '광주학생 운동' 이후 민주화를 위한 최초의 학생시위였다는 점과 2·28주역들은 48년 정부수립 후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세대가 교과서적 민주주의를 실천 했다는 점이다. 이날 학생들은 경북도청 광장에 모여 선언문을 낭독하고 자진해산했다 폭력이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야말로 순수한 고등학생들의 용기 있는 의사표시였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 대구 2·28과 광주 5·18을 두고 민주화운동의 동질적 집합개념으로 동주(同舟)하려는 것 같다. 영호남 갈등의 해소를 위해 '달빛동행'은 좋으나 대구 2·28과 광주 5·18은 그 시위의 성격 규모 결과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광주5·18은 1980년도 신군부의 등장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김대중 선생이 구속되자 광주시민들이 분노하여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당시 시위군중의 구호가 '계엄령 해제'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이였다. 시위는 과격했다. 전남도청을 점거하고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으로 국군과 맞섰다. 항쟁은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장기간 이어졌다. 이 사태로 국군과 많은 광주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해방 후 가장 불행한 정치적 조요(騷擾) 사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후 정부가 광주 5·18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시위대가 무기고를 탈취하여 전남도청을 점령하고 국군과 맞섰다는 점과 광주교도소를 수차례 공격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를 민주화운동으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비하여 대구 2·28 학생민주화운동은 다르다. 당시 학생들의 구호는 '학원에 자유를 달라' '동방의 별들아 횃불을 밝혀라'고 외치면서 저지하는 경찰관의 곤봉을 피해 중앙로를 달렸다. 학생들은 어떤 정치적 요구를 하지 않았다. 다만 일요일 등교는 독재적 발상으로 부당하다는 주장 이였다. 당시 대구 시민 모두가 학생들의 주장에 공감하였고 경찰관을 피해 가정집에 뛰어든 학생들을 숨겨줬다.

대구 2·28을 교과서적인 고등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라고 한다면 광주 5·18은 과격한 정치적 요구로 많은 피를 흘린 시민항쟁으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광주 5·18과 대구 2·28을 같은 민주화 운동이라는 범주에서 평가되는 것은 옳지 못한 것 같다. '달빛동행'이라는 미명 때문에 행여 2·28 민주화 운동의 고결함이 퇴색(褪色) 될까 심히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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