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변천·선유굴·옥선대 한 눈에…대대로 정직·의리 실천

▲ 사월 종가 전경.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논어 구절을 새겨 평생을 경계하는 삶을 살았던 사월공(沙月公) 조임(趙任).

영양에는 조광조를 탄핵했던 기묘사화를 피해 입향한 한양 조씨들이 4개의 파(派)를 이룬 집성촌이 있는데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의 수월공, 일월면 가곡리의 약산공, 일월면 주곡리의 호은공, 영양읍 하원리의 사월공이 그 맥이다.

이들은 일찍이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나라에 공을 세웠고 그 중 수월공 조검과 사월공 조임 형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사재를 털어 군자금을 대고 전쟁터에 나아가 큰 공을 세우면서 정2품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음모와 술수로 점철됐던 벼슬살이에 염증을 느낀 사월공은 기묘사화때 낙향했다. 그리고 1602년 무렵 반변천, 선유굴, 옥선대, 영혈사, 비파담 등 뛰어난 경관으로 둘러싸인 영양읍 하원리에 터를 잡았으며 사월종택을 건립해 그 자손들이 500여 년을 영양에서 살고 있다.

현재 사월종택에는 노종부 이위생(87)씨 홀로 종택을 지키고 있으며, 주말이면 포스코 강판 대표이사로 퇴직한 종손 조준길(66)씨가 가끔 종가에 머물면서 종손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다.

▲ 노종부 이위생.



△종손에게 듣는 사월 종가 이야기

한양 조 씨의 시조 조지수의 10대손인 조원이 선조인 조광조(1482~1519)가 기묘사화에 연루돼 위기에 처하자 1553년 손자 조원이 영양 원당리(현 하원리)에 터전을 일구고 슬하에 조광인, 조광의 형제를 두었는데 사월공 조임(趙任·1573~1644)은 조광인의 차남으로 태었다.

조임은 10세 때 부친을 여의고, 영해면 원구2리 옷금 안동 권씨 종가에 장가를 든 후 처외가인 인량리 대흥 백씨 백장단(白長湍)댁의 재산을 천석 넘게 얻어 이 재물을 가지고 이름난 승려 성지가 터를 잡은 이곳에 종택을 세웠는데 종택은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 상류의 옥선대를 바라보는 경승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임란 등의 전란에도 병화를 입지 않아 영양에서 제일가는 명지로 꼽히는 곳이다.

경북유형문화재 52호인 종택 월담헌은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큰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안동지방 뜰집(ㅁ자집) 형태의 가옥으로 사랑채에 누마루를 만들어 건물을 한층 높인 것이 이 가옥의 특징이다.

'월담헌'이란 이름은 주자의 '무이구곡가'에서 가져왔고, 현판의 글씨는 창석 이준이 섰으며, 동쪽 담장 밖에는 사당에는 성화(成化) 17년(1481)이라 새겨진 와당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종택은 옛 고택 중 매우 희귀하게 자연 지형을 이용해 누각을 주 건물로, 사각형으로 배치된 개인 주택으로 정남향(正南向)인 집은 궁중 건물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각은 특이하게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방이 셋이고, 마루가 4칸으로 규모가 크고 건축 양식으로 누마루의 각 문에는 중간설주를 문짝 사이에 배치했으며, 현재 누각형 재청은 사당 앞쪽에 있었으나 소실되고 없다.

월담헌 대청에 오르면 길고 짧은 제목으로 오묘하게 교차시킨 우물천정과 누마루에는 자연풍광을 그대로 끌어 들일 수 있도록 조성했으며, 벽에는 '월담헌기', '축천단기' 등의 편액이 걸려있어 선현들의 채취도 느껴볼 수 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나라에서는 군량미가 부족해 모속령을 내려지자 사월공은 곳간을 열어 양곡을 나라에 헌납했으며, 1636년 청나라가 다시 침입했으나 이미 70가까운 고령이라 몸소 싸움터에 나갈 수 없게 되자 집 뒤에 단을 세우고 매일 밤 목욕재계한 후 단에 올라 이 땅에서 오랑캐를 몰아 낼 것을 하늘에 빌었으나 남한산성에서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에 올라 통곡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으며, 이 단이 '축천단' 이다.

이후 사월공은 문을 닫고 폐인으로 자처하며 거처하는 집의 당호를 '월담헌'이라 하고 모정을 지어 숙운정(宿雲亭)이란 편액을 걸어 산수를 벗하며 시가를 짓고 지기들과 울분을 삭이고 시사를 논했으나 숙운정은 200여년의 세월을 견디며 퇴락했으나 1829~1893년 중건했다.

▲ 종손 조준길.



△종가와 가훈과 종손 이야기

종가의 자녀들은 무엇보다 어렸을 적부터 반듯한 행동거지를 몸에 익혔다. 사월 종가의 가훈은 '정직하고 의리를 지켜야 한다'로 이는 선조인 조광조가 중종에게 올린 '책문'의 답안 가운데 하나다.

종손은 가훈인 선조 조광조가 올린 답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공자는 성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성실은 기강을 세우는 근본이고 실효를 거두는 바탕으로 자연의 질서는 지극히 규칙적이어서 한순간에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물은 자연의 필연적인 이치에 따랐던 것이다. 성인의 마음 또한 지극히 성실해서 한 순간도 거짓이 없다. 이에 따라 모든 일은 성인의 이러한 성실함에 따라던 것"이라고 말했다.

종손 역시 '정직하고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가훈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며 실천하고자 노력해왔으며, 자녀들에게도 심어주고 있다.

종가를 지키고 있는 종손 조준길씨의 어머니인 노종부 이위생씨는 진성 이씨로 2남4녀 가운데 장녀로 17세 되던 해 안동 토계리(하리)에서 12대 종손 조관호(1931~1998)와 혼인했다.

당시 시아버지는 34세, 시어머니는 36세였으며, 시동생 1명과 시누이 5명과 시집온 지 4년 만에 종손을 비롯해 슬하에 2남4녀를 두는 등 대가족의 살림살이를 살았다.

또 82세로 작고한 시어머니와 35년 동안 같은 방에 기거하면서 고부사이가 아닌 부녀 사이처럼 가깝게 지냈으며, 시어머니로부터 내림음식 등과 봉제사 존빈객의 예도 익혀 집안의 대소사를 챙겼다.

이씨는 "종부로서 살면서 힘 들 때도 많았지만 시어머님이 있었기에 고난을 이길 수 있었다"며 "종부로서 삶은 운명이고 숙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60여 년 동안 종가를 지킬 수 있었다"고 노종부의 삶을 회상했다.

13대 종손인 조준길씨는 어릴 적부터 가훈을 실천하고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초등 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대구로 유학했으며, 포철에 입사해 2012년 포스코강판 대표이사로 퇴직했다.

▲ 종가와 연결된 사랑채 월담헌 모습.


오랜 기간 객지 생활을 하면서도 종가로 돌아와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집안의 대소사를 챙겼으며, 퇴임 후에는 작고한 선친을 대신해 문중행사는 물론 타 문중의 제사나 행사에 참여하는 등 문중의 종손으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직장 생활로 충분히 익히지 못했던 종가문화에 대해 공부도 하고 있으며, 관련 학술행사나 문중 모임에도 참석해 견문을 넓히고 있다.

현재 외국에 잠시 체류 중인 조씨는"퇴임 후 종손은 종가 밖 세상과 활발한 교류를 함으로써 사월종가의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며 "지금은 잠시 일이 있어 외국에 체류 중이지만 유형 문화를 보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종가의 무형 문화제를 계승하는 일 또한 종손에게 주어진 사명이므로 오는 12월 귀국해 종가에 머물면서 사월 종가만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종손으로서 체계인 활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 사월 조임 선생인 건립한 숙원정으로 지금까지도 빈객접대와 문중회의 등이 열린다.


정형기 기자
정형기 기자 jeonghk@kyongbuk.com

경북교육청, 안동지역 대학·병원, 경북도 산하기관, 영양군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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