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한칸 달 한칸 청풍 한칸, 강산 들일데 없어 둘러두고 보리라

▲ 송순이 중종 28년(1533)에 지은 면앙정. 송순이 77세에 의정부 우참찬을 끝으로 공직을 마치고 낙향해 91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유유자적했던 정자다.
면앙정(정정정)은 전남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제월봉 아래 언덕에 있다. 너른 평야에 여인네 젖무덤 같이 봉긋 솟은 언덕에 터를 잡았다. 정자로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숲 사이로 난 돌계단 길을 걷는데 이마에 땀이 송글 송글 맺힌다. 길 옆에는 자주괴불주머니가 소담스럽게 펴 있다. 양귀비목 현호색과의 식물이다. 크게 보면 양귀비인데 그래서 그런지 독성이 있는 유독식물이다. 꽃의 끝 부분은 보라색, 아래는 흰색, 잎은 녹색이어서 이 삼색의 조화가 신비롭다. 계단이 끝나면 제법 너른 평지가 나오고 그 평지의 끝에 정자가 서 있다.

'면앙'은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사심도 없고 꾸밈도 없다. 자연그대로의 삶을 추구하는 그의 심성이 잘 드러난다. '면앙정 삼언시'에서 정자의 유래를 잘 설명하고 있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르면 하늘이라

정자 속에는 크고 넓은 흥이 있네

풍월을 불러들이고 아름다운 산천은 끌어당겨

명아주 지팡이 짚고 가며 한 평생을 보내리라



정자는 소박하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흔한 구조다. 마루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마련하니 자연스레 정면과 좌우 3면에 마루가 남는다. 마루에 앉아 시회를 하거나 술을 마시고 비가 오거나 날이 추우면 방안에서 은일의 삶을 즐겼을 터. 팔작지붕에 처마의 네 귀에 활주를 달았다. 정자 앞은 너른 마당에 제월봉으로 막혔고 정작 탁트인 경관은 정자의 뒤편에 있다. 가까이는 옥천산 용천산 산줄기들이 어깨를 맞대어 시립해 있고 발아래 사람의 집과 들판, 강이 펼쳐진다. 멀리는 추월산과 무등산까지 100리에 이르는 풍광이 한눈에 조망되는 명소다.

'넓은 바위 위에 송죽을 헤치고/ 정자를 앉혔으니 구름 탄 청학이/ 천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버렸는 듯/ 옥천산 용천산 나린 물이/ 정자 앞 넓은 들에 줄기마다 퍼진 듯이/ 넓거든 길지 말거나 푸르거든 희지 말거나/ 쌍용이 뒤트는 듯 긴 깁을 펴놓은 듯'- 송순의 '면앙정가' 중에서
▲ 정자에서 바라본 풍경이 평화롭다.

그러나 '면앙정가'에서 노래하듯 평야 사이를 '옥천산과 용천산이 나린 물이 정자 앞 넓은 들에 줄기마다' 퍼져 나간다는 강은 들판 가득 메운 비닐하우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산천도 의구하지 않고 인걸도 온데 간 데 없다. 그럼에도 '10년을 경영해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는 송순의 읊조림이 꼭 들어맞는 풍광이라고 생각했다. 정자가 있는 제월봉의 제월은 '비갠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이다. '흉포쇄락 여광풍제월(마음이 넓어 자질구레한 것에 거리끼지 않고 성격이 쾌활하여 맑고 깨끗하기가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날의 달과 같다)'에서 따왔다. 3칸 정자에 나 한칸, 달 한칸, 청풍 한칸 맡겨뒀다는 뜻을 알만하다.

송순이 이곳에 정자를 짓게 된 때는 중종 28년(1533년) 41세 되던 해다. 김안로 일파가 세력을 잡자 공직에서 물러나 이곳 고향에서 시를 읊으며 지냈다. 3년을 은거 끝에 김안로일파가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가 77세에 의정부 우참찬을 끝으로 공직을 마친다. 그는 다시 이곳에 돌아와 91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유유자적했다. 이곳에서 이황과 교류했으며 기대승, 임제, 정철 같은 후학과 함께 호남제일의 가단(歌檀)을 이루었다.

송순이 호남가단에서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그의 나이 87세 때다. 과거급제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회방(回榜) 잔치가 열렸다. 인근의 유명인사 1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는데 잔치를 마치자 정철, 임제, 고경명, 이후백 등 4명의 제자가 스승을 손가마에 태우고 언덕길을 내려왔다. 4명의 제자는 후일 조선의 대표적인 시인이 됐다.

송순은 '면앙정'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뜻을 같이하는 인사와 '면앙정가단'을 결성해 풍류를 즐기며 소위 '면앙우주'를 펼쳐보였다. 천지만물의 이치를 심성의 수양으로 내면화하는 이상적 공간이 면앙우주이고 그 이상을 실현하는 현실적 공간이 면앙정이다.

정자 앞 마당에는 '면앙정가' 한 구절을 새긴 비가 있고 송순이 정자를 지은 뒤 심었다는 참나무 두 그루가 정자 앞뒤로 시립하듯 서 있다. 정자 안은 소박한 외관과는 달리 대한민국 대표 가사 시인들의 전시회장이다. 고봉 기대승의 '면앙정기', 백호 임제의 '면앙정부', 석천 임억령 의 '면앙정 30경', 송순 자신의 '면앙정 삼언가'가 판각돼 걸려 있다.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의 시도 걸려 있다.

'면앙정가'는 정극인의 '상춘곡'과 함께 호남 가사 문학의 원류가 된다. 내용 형식 가풍 등에서는 정철의 '성산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철은 담양에서 면앙정과 식영정 등을 찾아다니며 가사를 지었고 나중에는 자신의 호를 따 송강정 정자를 세우고 거기서 사미인곡을 짓기도 했다.
▲ 정자 현판에 면앙정이란 글이 선명하다.

송순은 '제월봉 아래 언덕에 정자를 세우고 면앙정가'를 지으며 추월산에서 무등산까지 100리에 이르는 풍광의 주인이 됐다. 시를 통해 정자 속으로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들였다. 시를 통해 불러들인 풍월강산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며 자연과 합치했다. 정자의 위치와 산세, 정자에서 사계절의 변화를 관찰하고 노래했으며 강물이 흐르는 모양과 하늘을 나는 청학과 기러기와 벗을 하기도 했다. 가마타고 좁은 길을 가는 모습을 그렸다. 술이 익으면 친구들을 불러 마시며 강산풍월의 맹주가 됐다.

면앙정은 소박하고 특징 없는 정자이지만 송순 자신 을 비롯해 정철, 임억령, 임제, 기대승 같은 한국문학의 스타작가를 배출한 위대한 건축물이다. 송순의 무덤은 정자에서 제월봉 정상 쪽으로 100m 지점에 그의 무덤이 있다.

이안눌은 면앙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높고 평평한 마을에 옛 숲이 높이 솟았고

올라와 보니 쏠리는 마음이 기록하기 힘드네

서쪽을 바라보니 들판의 끝은 어디인가

남쪽에 와서 보니 뛰어난 경치 이 정자가 으뜸이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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