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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탐사취재- 5. 이방인을 불러들인 '고래'

[경북 동해안 1천리를 가다] '경해'로 불린 동해…19세기 서구 열강 '고래싸움'에 씨 말라

양병환기자,조준호기자 등록일 2016년04월06일 21시47분  
전 세계적으로 고래 고기를 먹는 민족은 많지 않다. 손으로 꼽으라면 일본을 비롯해 우리나라, 일부 소수민족들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8세기때부터 전 세계적으로 고래포획을 위해 대양을 넘나드는 포경선으로 인해 수난을 받았다.

왜 선진국은 고래잡이에 열 올렸을까? 수염고래의 기름으로 마가린과 글리세린, 양초를 만들었고, 향고래의 기름은 산업용기계, 정밀기계 등의 윤활유, 연필과 화장품 원료, 고래의 간 등은 의약품 등에 사용됐다.

고래는 축출단계를 거쳐 수백가지의 공산품으로 재탄생되는 등 산업혁명의 요긴한 원자재였다. 특히 파리나 런던 등 대도시를 밝히는데도 고래의 기름 등이 사용됐다. 이런 이유로 포경산업은 나라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거대산업으로 성장했다.

현재 고래는 몇 나라를 제외하고 포획이 금지돼 있다. 포경금지를 추진한 나라는 고래산업으로 강대국이 된 아이러니한 구조를 갖고 있다. 1946년 12월에 미국 워싱턴에서 창설된 국제포경위원회는 네덜란드를 비롯한 노르웨이, 미국, 프랑스, 러시아, 덴마크, 아이슬란드, 영국 등 19개국이 참가해 고래류의 포획을 금지할 것 등을 처음으로 논의했다. 고래산업이 사양길로 간 것에는 고래 개체 수 감소와 대체할 대체물을 찾았기 때문이다. 바로 값싼 대체물은 석유와 조조바 나무 등이다.

또, 장시간 대양을 넘나드는 포경선의 위험과 노동집약적인 구조인 포경산업 종사자는 미국을 비롯한 멕시코, 페루 등에 금광산업이 활성화를 띠자 너나 할 것 없이 노다지의 꿈을 안고 이동했다.

국내 고래산업의 자료는 울산시박물관, 장생포 고래박물관 등지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속담이나 비유단어에 고래가 많이 사용됐다. 그만큼 민족과 함께한 해양포유류였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술 많이 먹는 사람을 '술고래', 큰 도박꾼을 '고래', 끈질긴 형태는 '고래심줄 같다', 넓은 장소나 집은 '고래 등 같다'는 표현으로 지금까지도 사용한다.

동해 울산을 비롯해 영일만은 고래의 도시였다. 바다는 경해(鯨海)라 불릴 정도로 고래가 지천이 었다. 한 예로 1941년부터 44년까지 4년간 일본 동양포경주식회사는 동해에서 6천578마리를 잡았다. 이전 미국, 소련 등 포경국가에서 무차별 포획을 한 후에도 이처럼 많았다.
▲ 울산시 태화강 상류 반구대암각화.

조선 중종 26년(1531)에 발간된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울산편에는 경해(鯨海)라는 명칭이 있다. 경해(鯨海), 고래의 바다라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 동해는 고래의 집합지였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고래 흔적은 울산시 태화강 상류 대곡리 골짜기에 자리 잡은 반구대암각화다. 세계 최초의 포경 유적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암각화에는 약 290여점의 사람, 바다, 육지동물 등의 사냥과 어로장면을 형상화 한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285호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돼 있다.

암각화에 새긴 고래류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 등을 형상화 한 그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울산 황성동 폐총유적지에서 동물뼈 작살촉(골촉)이 박힌 고래뼈가 출토돼 선사시대부터 고래사냥을 한 것을 보더라도 울산이 고래의 본향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바다로부터 약 20㎞나 떨어진 심산계곡 강 암벽에 고래그림이 있다. 고래는 작은 체구라 하더라도 무게가 수 t이 훌쩍 넘는다. 바다에서 사냥한 고래를 정착지까지 어떻게 옮겼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반구대 고래박물관 등에 전시된 자료를 토대로 유추할 수 있다. 태화강은 이전엔 지금보다 수면이 높았고 강폭도 수심도 깊었다.

퇴적층을 분석한 것 등을 보면 태화강은 바다로 이어주는 뱃길이었다. 오랜 세월 상류의 퇴적물이 하구로 내려와 퇴적된 것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당시 잡은 고래는 육로가 아닌 뱃길을 따라 옮겨 정착지 근처에서 해체를 했다. 암각화에 자세히 그림으로 남겼다.

울산이 닿아 있는 동해바다를 경해라 부른 것은 여러 자료에 많이 나온다. 조선 후기 사천왕사 터 부근에서 발견된 문무왕 능비의 비편에는 분골경진(粉骨鯨津)이란 글귀가 있다. 문무왕이 죽어 장사지낼 때 화장한 뼛가루를 고래가 사는 바다에 뿌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중국의 원나라와 명나라 시절(서기 1271-16443년)에 동해를 경해(鯨海)라 불렀다. 동해에는 많은 고래가 살고 있었고, 선사시대부터 이를 활용했던 것이다.

그렇다가 조선이 건국되고 고래를 소금과 더불어 국유재산으로 분류하면서부터 등한시 됐다. 고래를 잡아도 국가재산이기 때문에 경해에 유영하는 고래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요즘 고래잡이가 금지된 후 혼획(混獲)된 고래는 유통 가능해 어민들에게는 고래가 로또인 셈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관리나 국가에 로또였다. 고래 기름을 짜기 위해선 주민들의 고혈을 짜는 구조였다.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나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이를 자세히 거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해 해안에 가끔 죽은 고래가 떠밀려오는 경우가 있는데 기름이 매우 많아 이익이 아주 많다. 그러나 관에서 그 이익을 독차지해 도리어 민폐가 되므로 여러 사람이 혹 죽은 고래를 바다에 밀어 넣어 다른 지역에 떠밀려 가도록하게 한다'고 했다.

이처럼 경해라 불린 동해의 고래는 조선시대 백성에게는 천덕꾸러기였다. 고래사냥은 점차 쇠퇴해갔다. 또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신앙도 한몫했다. 집단어로 구조인 고래를 멀리하면서 동해는 점점 비워졌다.

반면, 일본은 고래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야마구치현의 센자키만에는 오미시마라는 섬이 있다. 이 섬 가요이우리라는 동네 절에는 포경으로 죽은 고래의 혼을 달래는 성불의식이 1679년부터 매년 4월 29일 시작해 닷새동안 거행된다.

이 절은 고래 사리를 납골한 관음당이 있다. 또 임신한 고래는 새끼를 성불하는 행위도 이어졌다. 게다가 고래의 망자명부까지 작성, 고래 포획 날짜와 사후에 부여한 계명까지 기입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미국 등 유럽의 고래잡이 방식은 주로 투창식, 일본은 이와 반대로 해안선을 이용한 그물잡이 방식을 1천900년 전까지 사용했다. 우리나라는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두 가지 방식 모두 선사시대부터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영일만 인근 신광(神光)에서 철을 생산했다. 삼한 철기 문화 중 발상지가 울산을 비롯해 창원, 포항 등지였다.

아마도 재료인 철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의 제철 과정은 강모래 속에서 거두어 올린 사철(沙鐵)을 원재료로 썼다. 사철을 진흙으로 빚은 가마솥에 넣고 여기에 얄팍하게 구운 숯 조각을 함께 보탠다. 이 숯 조각에 불을 붙여 사흘 밤낮 내내 불을 땐다.

철기제조에 재료도 중요하지만 그 재료를 녹이는 장시간에 걸친 화력도 중요하다. 고대의 제철학에서는 고도의 발열량이 나면서도 오래 타는 초탄(焦炭)으로 많은 철(鐵)을 만들었다 한다.

명의 방이지(方以智) 초탄제조법에 대해 거론한 물리소직(物理小織)에는 "석탄(石炭)에 '고래기름'같은 취매(臭煤)을 태워 녹이다가 덮어 이것이 돌이 되도록 한다. 이를 노(爐)에 넣으면 5일 동안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 고래가 없는 중국은 아마도 중국의 관리가 한반도에서 구해간 기름을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포항시 영일현의 연오랑세오녀가 일본에 전수해준 것은 철기 제조술이라 한다. 공교롭게도 세오녀가 일본으로 이동한 곳도 고래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철기 재료인 흑요석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고래와 우리나라 철기문화의 관계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한번쯤 인과관계를 연구해 볼 필요성이 있을 듯하다.

한편, 고래 중 귀신고래는 유일하게 학명이 우리나라로 등재돼 있다. 정확히 서북태평양 계군인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이다. 일명 쇠고래라고도 불리며 천연기념물 제126호이다. 일생 동안 태평양을 회유하며 동해는 임신 전 후로 몸을 추스르는 바다였다.

귀신고래가 태평양을 넘나드는 이동경로가 강대국 포경선을 동해바다로 진출케 한 것이다. 한국귀신고래는 1964년 5마리를 포획한 기록을 끝으로 과도한 남획의 결과 동해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 멸종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1993년 사할린 연안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꾸준히 개체수가 조금씩 증가했지만 한국계 귀신고래는 현재까지 가장 심각한 멸종위기에 처한 고래다.
▲ 반구대암각화 도면. 많은 고래류와 해체장면 등이 담겨 있다. 암각화 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때 고래를 비롯해 해양자원은 정부의 무관심과 해양업을 천시한 문화 탓에 동해는 비워졌다. 이 자리에 서구열강들은 너도나도 우리바다 동해를 차지하기 위해 넘나들었다.

산업 혁명기에 접어든 서구 열강들은 18세기부터 기름과 원자재인 고래를 잡기 위해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닥치는 대로 포획했다. 북대서양과 북태평양의 고래자원을 남획하고 19세기 중반에는 고래를 찾아 동해로 들어왔다. 이들은 대양을 항해하며 발견한 섬 등에 그들의 이름을 부여했다. 또 식물과 동물 종 연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고래의 삶은 동해바다와 닮았다. 가치를 모르면 타국에 빼앗길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우리의 바다 동해, 우리바다만큼 연구하고 가치를 찾아 보호하고 후대에 물려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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