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 바람·은은한 달빛…자연 벗삼아 숨어사는 즐거움 택하다

▲ 조선 시대 선비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 아름다운 계곡과 푸른 녹음이 어우러져 천혜의 절경을 자랑한다.

담양 소쇄원(瀟灑園)의 4월은 황홀하다. 계곡을 끼고 오르는 원림 입구는 대나무숲이 하늘을 덮어 기운이 서늘하고 마음이 엄중하다. 대나무가 일렁거리며 바람을 불러올 때 마다 포항 호미곶 아득한 바위벼랑을 두드리는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놀란 새들이 우짖고 날며드는 모습을 보니 '기운이 맑고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원림의 이름이 과연 적당하다고 생각됐다.

4월 중순을 넘긴 소쇄원은 꽃과 녹음의 교대식이 한창이다. 꽃이 진 자리에 새 잎이 나고 초롱초롱 맑은 얼굴을 한 녹음이 고개를 내민다. 한 켠에서는 아직 천수를 누리지 못한 철부지 꽃들이 녹음이야 오든 말든 내 몫의 생을 마저 즐기고 가겠다며 버티고 있다. 정치권에서 익숙하게 본 그림이다.

소쇄원의 '소쇄'는 중국 제나라때 공덕장의 '북산이문'에서 나온 말이다. "은자는 지조가 굳어서 속세를 뛰어넘는 풍채가 있어야 하고 인품은 맑고 명리를 탐하지 아니하며 속세를 벗어난 고결한 사상을 가져야 하며…"라는 의미다.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1503~1557)는 17세에 소년 등과할 정도로 잘나가는 선비였다. 그러던 그가 시골 고향으로 내려와 '소쇄'한 삶을 살게 된 데는 아픈 사연이 있다. 그는 15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서 조광조의 제자가 됐다. 2년 만에 17세에 현량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그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를 갔다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떴다. 세력을 잡은 훈구파는 현량과를 폐지하고 급제자의 자격을 박탈했다. 조광조를 따라 능주까지 갔던 그는 스승이 죽고 급제 자격까지 박탈당하자 충격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소쇄원을 짓고 숨어사는 즐거움을 택했다.

새봄에 한번 취해 동산의 노인이 되니
소나무 숲에서는 흩어진 머리에 바람이 부네
중이 되고자 꿈에 읊조린 일 이미 떠났고
흰구름 밝은 달은 물소리와 함께 어울리네

-조선시대 시인 옥봉 백광운의 '소쇄원'

소쇄원은 산에서 내려오는 계류를 중심으로 양쪽 언덕에 광풍각 제월당 대봉대 화계 연지 석천 등이 배치돼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원림이다. 정원문화의 정수라는 이야기다. 담벼락에는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 같은 글씨가 석판과 목판으로 새겨져 있다.

광풍각(光風閣)-광풍각의 '광풍'은 송나라 황정견이 주돈이라는 사람의 인물됨을 가르켜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밝음은 마치 비갠 날 청량하게 부는 바람과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과 같다'라는 데서 비롯됐다. 이 시구 중 '광풍제월'에서 따왔다. 비오는 날 청량하게 부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정면 세칸, 측면 세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한 칸이 방이고 뒤쪽에는 함실 항아리가 있다. 방이 있는 뒤쪽을 제외한 세 방향에는 삼분합의 들어열개문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분합문을 들어 바깥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가을이 되면 함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봄을 기약하며 책을 읽고 시를 썼을 것이다.

소쇄원에서 사랑방 구실을 하는 광풍각은 조선시대 정자의 참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소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버드나무 목백일홍 동백나무 오동나무 매화나무가 시립해 있고 매화가 진 매단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펴 햇살에 눈이 부시다.

기가 막힌 것은 광풍각 앞을 흐르는 계곡이다. 물이 많지 않으나 장마철에는 쏟아지는 폭포수가 천둥소리를 내며 계곡을 가로지르는데 장관이다. 마루에서 보면 외나무다리가 보이고 다리너머로 '오곡문'이라는 글자가 쓰인 담장이 보인다. 계곡 건너 동북쪽으로는 봉황을 기다린다는 '대봉대'가 눈에 들어온다. 조성 당시 계곡 암반에 석가산이 있었고 뒤쪽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복사동산이 있었다고 한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제월당(霽月堂)-광풍각이 사랑방 노릇을 했다면 제월당은 주인의 독서를 비롯한 사생활이 이뤄지는 폐쇄적인 공간이다. 현판 글씨는 역시 우암 송시열이 썼다.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으로 왼쪽 한칸에 방이 있으며 함실아궁이를 설치했다.

제월당은 소쇄원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자 마루에서 보면 광풍각과 대봉대가 내려다 보이고 애양단과 오곡문 대나무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산보는 소쇄원 전체를 관조하는 자리에서 봄에는 매화와 복사꽃을, 여름에는 목백일홍을 즐기며 가슴 속에 품은 한을 계곡물에 실어내리면서 마음속의 불덩어리를 지워갔을 것이다.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천지만물에는 주인이 있어 내 것이 아니라 한 터럭도 취할 수 없지만, 강가에 부는 맑은 바람과 산 위에 뜨는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음악이 되고 눈으로 보면 경치가 되어 이것을 가져가도 금하는 사람이 없고 사용해도 닳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창고다"라고 했다. 숨어사는 즐거움이다.

□ 가볼만한 곳-한국가사문학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다. 담양은 메타세콰이어길, 죽녹원 등 관광상품이 유명하지만 대한민국 가사문학의 메카이며 조선 누정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라는 점에서 더 높은 가치가 있다. 송순이 면앙정가를 쓴 '면앙정' 정철이 '성산별곡'을 쓴 '식영정',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쓴 '송강정'이 있는 곳이다.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등 가사문학의 주류를 이룬 정자와 인근해 있는 한국가사문학관에는 이 인근송순의 '면앙집'과 정철의 '송강집' 및 친필 유묵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밖에 가사문학 관련 서화 및 유물 1만 1천461점, 담양권 가사 18편과 관계문헌, 가사 관련 도서 약 1만 5천권 등이 있다. 본관과 부속 건물인 자미정·세심정·산방·전통찻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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