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만석꾼 경주 최부자집의 뿌리

▲ 경주 남쪽의 대종가인 경주 잠와 최진립 종가인 충의당 전경.
▲ 경주최씨 정무공 최진립 종가 14대 종손 최채량씨.
경주시에서 울산 언양읍 방향으로 12km 정도 가다 보면 내남면 이조리가 있다.

포석정, 삼릉을 지나 좁은 도로를 한참 달리다, 형산강을 가로지르는 이조교를 건너면 마을이 보인다.

이조리는 넓은 벌판 한가운데 학교와 면사무소, 상가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이 마을 안쪽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모두 참전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정무공 최진립이 생애를 보낸 충의당이 있다.

충의당은 강동면 양동마을의 경주손씨, 여강이씨와 함께 경주 삼대 유력가문인 잠와 최진립 장군의 종택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할 때 항상 첫 손에 꼽히는 최부자집의 원류가 충의당이다.

종택 입구에는 격조 있게 가꾸어진 소나무들과 파란 잔디로 잘 단장된 충의공원이 있다.

소나무의 푸르고 정정한 기상으로 가득한 넓은 공원에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추앙하기 위해 마련된 기마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경주최씨 14대 종손 최채량 씨는 팔십대 중반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의 정정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충과 의의 가풍을 전하고 있다.
▲ 충의당 전경 항공사진.



△충신 청백리 정무공 최진립

고운 최치원 선생의 후손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1568년(선조 원년) 경주 현곡면 하구리 구미산 아래에서 참판공 최신보와 평해황씨 사이에 셋째로 태어났다.

장군은 25세에는 임진왜란을 당해 아우 최계종, 당숙 최신린, 최봉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27세에는 갑오 무과에 급제했으며, 47세에 통정대부로 경원도호부사를 지냈다.

67세에 의흥위부사직과 전라우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는 등 여러 벼슬을 거치는 동안 한결같이 청백함이 알려져 나라로부터 여러 차례 칭찬을 받았다.

장군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70세 노구로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전투를 계속하다가 순절했다.

이때 정무공의 엄중한 만류에도 충노(忠奴) 기별과 옥동이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종가에서는 이들의 영령을 기려 장군의 불천위 제사 뒤 상을 물려 제사를 지내는 전통을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

장군에게는 자헌대부 병조판서 벼슬이 내려졌고, 정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청백리로 뽑힘과 아울러 용산서원에 제향과 '충렬사우'라는 사액까지 내려졌다.

△경주 최부자의 혼이 시작된 충의당

경주최씨 대종가인 충의당은 정무공이 기거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당호를 흠흠당이라 했다.

1천여 평의 대지에 주생활 공간인 안채와 좌우 부속채, 사랑채와 대문채로 이뤄졌다.

충의당은 오랜 역사와 많은 사연을 담고 있지만 아담하기 이를 데 없다.

청렴과 근검을 가장 높은 가치로 삼았던 집안의 내력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충의당 배치는 전형적인 평지 배치로 건물 위계가 분명하다. 불천위 위패를 모신 사당, 정침, 사랑채, 좌우 부속채 및 행랑채 순으로 용마루 높이에 차이를 둬 위계를 보이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에는 사당이 있고, 사랑마당에는 다실로 사용되는 경모각과 충의당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충의당 뒤로는 흠흠당, 우산초려, 안채인 잠와고택이 안마당을 둘러싸고 자리 잡고 있는 전형적인 남부 지방 양반 가옥의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충의당을 방문하면 충노비(忠奴碑)와 회나무를 꼭 보아야 한다.

충노비는 평생에 걸쳐 최진립 장군을 따르다 병자호란 때 장군과 함께 목숨을 바친 노비 기별과 옥동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충의당 대문을 나서면 왼편으로 보이는 회나무는 최진립 장군이 직접 심은 것이라 전해진다.

이 나무는 1905년 고사(枯死)했다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1945년 갑자기 회생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전쟁을 거치며 여러 번 불에 탄 이후에도 여전히 푸른 잎이 돋아 신기한 나무로 회자되고 있다.

충의당에는 최진립 장군 때부터 내려오는 유물과 유품을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유물전시관의 면적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전시품은 최진립 장군과 그 후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엿볼 수 있다.

종택인 충의당에는 현재 종손과 종부가 거주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추앙하기 위해 충의당공원에 마련된 기마동상.


△종가의 가풍을 잇는 최채량 종손

경주최씨 최진립 종가 14대 종손 최채량 씨는 소박하면서 정갈하고, 아담하지만 위엄이 서린 충의당에서 지금도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작지만 깊은 뜻을 품고 있는 고택에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아름다운 의무를 다하기 위해 늘 웃는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고 있다.

최채량 종손은 충의당에 대해 "최부자가 백 년 동안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많은 이들을 도운 곳"이라고 말했다.

종손은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6·25전쟁 당시 고려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57년 대학을 졸업한 뒤 경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서울로 전근해 성일중, 잠실중, 영동고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다 선친의 우환으로 부산으로 전근해 직장 생활을 하다 얼마 뒤 경주 삼성고등학교로 옮겼고 그곳에서 정년을 맞았다.

교직에서 은퇴한 후 경주최씨 가문에서 실시하고 있는 선조현양사업과 문중의 일에 매달리면서 가문의 종가가 세상 밖으로 알려지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이조마을 집집마다 문패를 만들어 달았고, 종가에서 서실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기도 했다.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종가가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한 것이다.

평생 서예에 많은 관심을 보인 종손의 글씨는 경주에서도 알아주는 명필로 소문이 나 있다.

지난 2014년에는 경주예술의전당에서 13, 14, 15대가 함께하는 3대 서예전을 열기도 했다. 그는 서른여섯 군데에 흩어져 있는 묘소를 한군데로 모았으며, 용산서원의 향사도 두 번에서 한 번으로 줄이는 등 시대의 급격한 변화를 받아 들였다.

전통이 가진 본래의 의미는 지키면서 형식을 간소화 해 후손이 더 친근하게 다가가게 한 것이다.

충신이자 청백리인 정무공 최진립 종택을 지키고 있는 최채량 종손은 옛것만 고집하지 않고 현대와 조화를 이뤄가는 포용력을 가진 삶을 살고 있다.

최채량 종손은 "세상이 각박해지고 '우리'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해 질수록 진정한 나눔에 대한 목소리는 커진다"면서 "사당 옆에 있는 200여년이나 된 매실나무에서 딴 매실이 저의 1년 양식이다"고 말하며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했다.
황기환 기자
황기환 기자 hgeeh@kyongbuk.com

동남부권 본부장, 경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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