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는 '인과의 힘' 추종 나이 들어 '유비쿼터스' 신봉 신은 세계 속에 내재하는 힘

신(神)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신이 있다면 인간 세상이 이렇게 엉망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평생 살면서 신의 계시(啓示)를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이도 아마 드물 것입니다. 결혼(연애)이나 취업(진학)과 관련돼서 찾아오는 '원인 모를 확신' 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만, 그것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우연의 연쇄나 인연의 결과를 보고 사후(事後)에야 '아, 이게 그거였구나!'라고 느끼는 일은 누구나 한 번씩은 겪는 일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신은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이 지면에서 "신은 신전에 있다(내 거소에서 편하게 신을 찾지 말고 신전에 가서 엎드려 자비를 간구하라는 뜻입니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신은 계시로 존재한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시를 믿는 자는 신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것을 믿지 않는 자는 살아 생전에는 영영 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젊어서는 그런 '계시의 힘'을 신봉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는 '인과의 힘'을 더 추종했습니다. 세상을 좀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일어난 일은 언제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믿었습니다. 또 누군가 본 것은 언젠가는 제게도 보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좀 드니까 그게 아니란 걸 알겠습니다. 어떤 일은 단 한 번만 일어나고 또 어떤 것은 보이는 이들에게만 나타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비쿼터스(신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는 없는 거였습니다. 있다면 오직 일기일경(一機一境·사람마다 깨치는 길이 따로 있다)만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부터 야스퍼스라는 한 철학자의 인생 행로가 좀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법학을 공부하던 야스퍼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매료됩니다. 그의 성실한 문도로 살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프로이트의 문하를 떠납니다. 정신분석학은 믿을 수 없는 가설을 토대로 성립한 거대한 하나의 허구적 서사라고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관찰사실을 근거로' 인간 정신을 독단적으로 해석, 결국 '자유에 대한 모독'을 행했으며 그러한 관찰 밖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수많은 '인과적 가능성'을 무시함으로써 비학문적 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인간 정신의 일부를 해명한다'라고 일종의 유보 행위를 자처하는 것도 결국 거짓말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발견되는 원인'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인간을 해석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야스퍼스는 그 뒤 10년을 침묵하다가 그 유명한 저서 '철학'을 출판합니다. 나이 오십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는 거기서 계시(직관)를 '매개체 없이 작용하는 진정으로 위대한 것' 또는 '이성의 기적'으로 해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신은 세계를 초월하는 힘이 아니라 세계 속에 내재하는 힘입니다. 당연히 한 인간의 종교 행로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한 신성(神性)을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계시는 세상의 모든 원인을 뒤집는 신성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두어 달 전에 이번 총선의 결과를 미리 예측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계산에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까운 지인에게 그 내용을 전했더니, "희망 사항이죠? 제겐 왜 그런 게 왜 안 보일까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꼭 다 볼 필요도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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