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희·디스커버리미디어…설레는 삶, 그 여자의 다른 행복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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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표를 썼는가?"
"행복하지 않아서요."
"좋은 스펙, 좋은 회사, 높은 연봉…. 나라면 후회할 거 같다. 혹시 아깝지 않았는가?"
"전혀요!"

'홋카이도, 여행, 수다'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북해도에서 500일 동안 두근거리는 삶을 산 30대 여자의 여행 에세이이다.

작가는 일상 같은 여행 또는 여행 같은 일상 500일의 킨포크 라이프를 아름답고 감성적인 문장에 맛깔나게 담아내고 있다.

지은이는 교환학생과 국제 환경단체 인턴을 거쳐 350대 1의 경쟁을 뚫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금융회사에 취업을 한다. 하지만 '저녁이 없는 삶'과 보수적인 직장 문화, 그리고 깨뜨릴 수 없는 '유리천장'에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결국 그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 분명히 알고 가는' 낙화를 떠올리며 입사 3년 만에 사직서를 쓴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뒤따라 사표를 낸 남편과 함께 여름휴가 때 홀딱 반해버린 홋카이도로 긴 여행을 떠난다.

홋카이도는 '머무는 여행'을 막 시작한 젊은 부부를 홍차처럼 붉은 단풍잎을 흔들며 환영해주었다. 그들은 습자지에 떨어진 잉크처럼 자연스럽게 홋카이도에 스며든다.

‘홋카이도, 여행, 수다’엔 삿포로에서 오호츠크 해의 유빙까지, 지은이가 살고 여행하고 먹고 즐긴 북해도의 이름난 도시와 최고 여행지, 환상적인 자연, 유명 음식이 대부분 등장한다.

하지만 이 책의 더 큰 매력은 '숨 막히는 안정'을 버린 지은이가 '두근거리는 삶을' 가꾸어 가는 500일의 여정을 더불어 공유하는 즐거움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갈무리한 지은이의 내면 풍경을 엿보고, '머무는 여행'에서 건져 올린 희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재미도 무척 쏠쏠하다.

▲주말과 저녁이 없는 삶

몸은 지쳤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대학시절 지은이의 꿈은 우리나라 청춘들 대부분이 그렇듯 멋지고 안정된 직장을 얻는 것이었다. 그는 교환학생으로 미국을 다녀오고, 국제 환경단체에서 인턴 생활을 하고, 높은 토익 점수를 받는 등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졸업 후 지은이는 350대 1의 경쟁을 뚫고 손꼽히는 금융회사에 취업을 한다. 하지만 사회와 직장을 향한 그의 '짝사랑'은 딱, 거기까지였다.

취업과 동시에 '저녁이 없는 삶'이 시작되었다. 야근과 주말근무가 밥 먹듯 이어졌다. 효율성에 대해 가장 비효율적으로 논하는 회의는 일하고자 하는 의욕을 수시로 빼앗았다.

그는 상사와 고객을 만족시키느라 자신은 정작 지극히 불만족스런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보수적인 직장 문화와 여성에게 장벽 같은 '유리천장'은 예상보다 몇 배는 더 심각했다.

당장도 힘들었지만 미래 또한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야근과 주말근무로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던 어느 늦은 밤, 지은이는 문득 자신의 영혼이 먼지처럼 부서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선택지는 분명했다. 견디느냐? 사표를 쓰느냐? 그는 사표를 선택했다.

▲저녁이 있는 삶을 되찾자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 현실의 삶을 내려놓았을 땐 질서정연한 교차로에서 혼자 불법 유턴을 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상실감도 한 순간이었다. 24시간을 빠듯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를 흥분시켰다.

저녁이 있는 삶을 되찾았고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인간이 무척 감각적인 동물임을 뒤늦게 깨달았을 땐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자연과 사람과 세상에 대해 눈과 귀와 입, 나아가 세포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 너무 즐거웠다.

그는 자연이 분양해준 시간을 소중하고 살뜰하게 소비했다. 그가 머문 공간과 시간, 사람과 문화와 음식과 풍경과 파도소리, 바람과 향기와 어둠과 사케와 계절의 경계선을 즐겁게 감각하고 천천히 되새김질했다. 이를테면 이렇게.

홋카이도 넓은 평야에서 자유를 갈망했을 쌀. 햇빛과 하늘거리는 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했을 알맹이. 몇 해가 지나고 그 쌀은 우리 앞에 놓였다.

발효와 증류를 거친 한 홉의 투명한 술이 되어. 사케는 목을 타고 들어와 핏줄을 따라 유영했다. 그렇게 태양과 남동풍한테 얻은 따뜻함을 남겨놓고 곧 영영 떠나겠지.

낮에는 육식과 채식 사이에서 상념에 잠기더니, 밤에는 술에 취해 쌀로 철학 하는 시늉을 했다. 자유를 꿈꾼 쌀알, 따뜻하게 오른 취기. 왠지 모르게 하루키의 굴튀김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여행이 가져다 준 놀라운 변화

이제 온전히 '나'로 살기로 했다.

그는 온천에 누워 행복했던 교환학생 시절을 떠올리고, 카페와 산자락 도서관으로 산책을 다니며 독서와 걷는 즐거움에 빠진다.

어학원과 디저트 카페와 선술집에서 홋카이도 사람들과 섞이고, 전생 같은 도시 오타루에서 '러브레터'의 슬픈 감동을 다시 떠올린다.

광활하고 원시적인 자연 앞에서 경외감을 경험하는가 하면, 오호츠크 해를 건너온 유빙 체험을 하며 '리얼리티 자연'의 신비로운 질서를 느낀다.

사소한 불안과 고독을 즐기며 비에이, 하코다테, 무로란, 오비히로, 루스츠, 니세코, 시코츠 호수, 사코탄 블루, 온네토 호수, 토마무, 아바시리를 여행하고 나자 500일이 지났다.

그리고 그 즈음 변화를 감지한다. 내면 저 깊은 곳에서 살금살금 '또 다른 그'가 올라와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이제 가자."

그는 좌표를 한국으로 돌리며 인생의 새로운 좌표도 정했다. 오래도록, 계속 글 쓰며 '나'로 살기로!

비행기 좌석은 창가로 부탁했다. 홋카이도에서의 1년 반을 더듬고 나자 인천공항이었다. 그는 비행기 창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잘 지냈나요? 나는 잘 지냈어요!"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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