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 돈옹 김계영을 찬양하려 후손 김종한이 1820년에 지은 정자…당파와 매관매직으로 혼탁해진 세상 떠나 용계 맑은 물에 귀를 씻고 독야청청

▲ 분옥정 앞 계곡과 만지송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1동에 있다. 봉계1동을 치동이라고도 하는데 경주김씨 치동문중의 세거지이다. 입향조인 일암 김언헌이 병자호란을 피해 정착하면서 손수 벌채하고 마을터를 닦았다고 해서 처음에는 '벌치동'이라 했다.

남포항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기계면으로 가다가 우회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새마을운동 발상지 입간판이 서있는 사거리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 다음 사거리에서 봉좌마을 입간판과 분옥정이 나오면 왼쪽으로 꺾어 든다. 이정표를 따라 봉좌산 쪽으로 제법 들어가면 덕계지 저수지가 펼쳐지는 치동마을이 나오고 치동마을의 끝에 분옥정이 있다.

분옥정의 첫 인상은 장중하고 수려하다. 출입문 뒤에 서 있는 청솔이 심상치 않다. 수령이 무려 400년이다. 은행나무도 그 세월을 견뎠고, 분옥정 앞 소나무는 '만지송'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을 정도로 가지가 번성하다. 가지가 만개나 된다는 뜻이다. 나무의 격으로 본다면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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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알려진 분옥정(위)과 청류헌 현판.

분옥정은 유학자 돈옹 김계영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김종한이 1820년에 지은 정자이다. 김계영은 숙종때 성균관에 입격했으나 세상이 당파와 매관매직으로 혼탁해지자 벼슬을 포기하고 치동마을에 눌러앉아 시를 쓰며 일생을 마쳤다. 나중에 가선대부에 추증됐다. 김계영은 그 당시 심정을 분옥정 상류 개울바닥, 청석에 '세이탄(洗耳灘)'이라는 암각서를 새겨 표현했다.

세이탄의 '세이'는 '영천세이(潁川洗耳)'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 전설상의 임금인 요임금이 허유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으나 허유가 이를 거부한 채 기산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벼슬을 맡기자 허유는 산 아래 영수강에서 귀를 씻었다. 친구 소부가 강에 송아지 물을 먹이러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왜 그러느냐고 묻자 "깨끗하지 않은 말을 듣고 어찌 귀를 씻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소부는 그 물이 더러워졌으니 송아지 입도 더럽히겠다고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지 않고 돌아갔다는데서 비롯됐다. 창강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강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초사'의 탁영탁족과 같은 의미다. 김계영은 용계를 흐르는 맑은 물에 귀를 씻고 유유자적하며 독야청청 했으리라.

새는 그윽한 곳에 구름과 함께 자고
맑은 시냇물은 달과 같이 흐르네
홀로 이 밤이 길어 어정거리니
누가 나의 깊은 마음을 알리요
-김계영의 시-

분옥정은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분류되지만 정자 마루는 측면 1칸이고 정면 가운데 1칸에 방 두칸을 달아내 'T'자형의 독특한 구조를 완성했다. 암각바위에 세워진 정자의 전면기둥은 계곡 쪽으로 내어 세우면서도 지형에 따라 길이를 달리했고 뒤쪽 기둥은 석축기단에 세웠다. 맛배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분옥정'과 또다른 이름 '청류헌'은 한편의 그림을 보는 듯한 서경시다. '분옥'은 옥을 뿜어낸다는 뜻으로 작은 폭포에서 튀어오르는 물 방울이 옥구슬을 뿜어내는 듯한 모습에서 붙인 이름이다. '청류'는 물흐르는 소리가 잘 들린다는 뜻이다. 정자에 앉아 가만히 있으니 오감이 작동하는 공감감적 감동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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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추폭포.
정자 정면에서 보면 발아래 개울의 용추폭포가 끊임없이 물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포말을 만들어내고 시선을 정면으로 두면 깎아내린 절벽, 층암절벽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정자 정면 오른쪽에는 가지가 풍성한 '만지송'이 정자의 품격을 더해준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솔향기가 진하다.

분옥정의 숨은 보물은 추사 김정희 부자의 현판이다. 분옥정의 또다른 이름은 '용계정사(龍溪精舍)', '화수정(花樹亭)', '돈옹정', '청류헌(聽流軒)'인데 정자 안에 모두 걸려 있다. 용계정사와 화수정 현판은 추사 김정희 아버지 유당 김노경이 썼다. 김노경은 영조의 외증손인데 이조 예조 병조 판서를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현판글씨의 주인이 김노경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화수정기'에 나온다. 화수정기는 추사 김정희의 6촌형이며 당시 우의정이었던 김도희가 썼다. 기문에 "천리길을 달려와서 나의 종숙부 유당 상공에게 편액의 글씨를 청하였고 내게 정자의 기문을 부탁하므로…(중략) 내 이름을 그 정자 사이에 붙이는 것도 또한 다행한 일이라 이에 기문을 쓰노라"라고 쓴 뒤 '1884년 10월 우상 김도희기'라고 날짜는 물론 자신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기문을 썼음을 분명히 밝혔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130년전 쯤 전으로 돌아가 보자. 조선시대다. 한미한 시골의 촌노들이 영조의 외증손이며 삼조판서를 두루 거친 천하의 권세가 김노경을 찾아간다. 단지 종친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시골에서 종친간 화목을 도모하기 위해 정자 만들었으니 현판 글씨는 대감이 써달라, 정자의 기문은 대감의 5촌조카인 우의정 도희에게 써달라고 힘을 써달라'고 사정을 했던 모양이다. 종친을 통해 여기저기 연줄을 달았을 수도 있겠다. 김노경은 현판 글씨를 써줬고 우의정으로 있는 조카에게 힘을 써서 기문까지 받아줬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글씨를 받으러 천리길을 걸어갔던 정성에 탄복했던 것일까? 추사도 글씨를 보내왔다고 한다. 분옥정과 청류정 현판이 추사의 글씨라고 한다. 이 두 현판에는 추사의 낙관이 없어 추사글씨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나 현판 뒷면에 '도광 무자 중춘(1828년 청나라 도광8년 순조 28년 봄)에' 판서 종친 정희씨가 청류헌 분옥정 글씨를 썼고 두 액자를 그해 겨울 경주진영의 진장인 노혁씨가 사람을 시켜 조각을 하여 보내와 이듬해 (1829년) 정월 10일에 걸었다"라고 적혀있어 추사의 글씨임을 분명하다고 분옥정 관리인인 김수일씨는 주장하고 있다.

김씨는 현판의 낙관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버지 글씨가 걸려진 현판에 자식이 자신의 글씨를 걸고 낙관을 찍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판글씨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하고 체계적인 감정이나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 입향조인 일암 김언헌의 6대손인 하곡 김시원과 학파 김시형이 문중의 기금과 사재를 털어 세운 학당 남덕재.


■ 가볼만한 곳 / 남덕재(覽德齋)

1767년 입향조인 일암의 6대손인 하곡 김시원과 학파 김시형이 누구든지 배우지 못해 설움을 겪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며 문중의 기금과 사재를 털어 세운 학당이다.

당시 치동마을에 글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현판 '남덕재'는 1797년 형조판서이며 당대의 명필인 담녕 홍의호가 썼고 기문은 권병기가 지었다.

대문위에 지붕이 있고 지붕 뒤에 받침기둥을 둔 독특한 건축 양식이 눈에 띈다. 1867년, 1948년, 2009년 세차례에 걸쳐 중수됐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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