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운영에 기회의 균분 적용 서로 인정하고 하나씩 양보하면 공평·공정 자연스레 생겨난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민의가 드러났다. 십 여 년 만에 여소야대가 되면서 원구성의 윤곽이 잡혔다. 대통령의 불통정치에 대한 실망과 무능한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비판한다는 '인민(의식 있는 개인)들'의 정서가 정확하게 반영된 선거였지만, 전당대회를 앞둔 여야정당들의 자체 내 이전투구는 "네 탓"의 구태를 여전히 재연하기 시작했고, 대통령의 기자간담회의 모습도 오십 보 백보였다. 곧 벌어질 저급한 정객들의 쟁론에 벌써부터 역겨움이 밀려온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정치지도자들은 어쩌면 인민들을 철모르는 어린아이들로 여기나 보다. 여기서 아이 같은 인민들을 달랠 방법은 그들에게 없는 것일까?

민주주의를 꽃피웠던 원조인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도 사정은 같았다. 그런데 이들은 정치에서 우선 언어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었다. 구성원을 계층별로 나누고 지켜야 할 덕목을 제시하면서 그들을 대안의 실천으로 이끌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덕목을 '중용'이라고 명명했다. 개인의 덕이란 우선 중용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능력이었다. 인민들은 각 계층 즉 생산자, 수호자 및 통치자 계급의 덕목인 절제, 용기, 지혜란 무엇인지를 지적으로 습득했고, 다음으로 이것의 실천을 논의했다. 통치자는 인민들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로, 그들에게 신분과 덕목의 개념을 정확히 알려주고 실천적으로 이끄는 일에 탁월성을 발휘하는 사람이었다.

어버이가 아이를 키우는 일이 쉽지 않다. 애들은 늘 자기들의 입장에서 많은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애들의 요구를 그들의 방식대로 들어주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피자를 한 판 갖다놓고 서로 많이 먹으려고 싸우는 아이들 형제를 공평하게 만족시키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다. 형이니까 더 먹어야 한다는 맏이의 주장과 동생이라서 손해만 봤다는 둘째의 주장 사이를 조정하는 일은 난제이다. 그런데 덕목을 합리적으로 헤아려온 그리스의 후예인 서양 사람들은 한 아이에게 자르는 일을, 나머지에게는 취하는 일에 우선권을 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자르는 아이는 취하는 일에서 후순위가 되므로 정성을 다해서 같은 두 조각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회를 나눔으로써 합리성을 펴는 현실적 실천이 된다.

만일 우리가 정치에서나 대통령의 국정운영에서 이 기회의 균분을 적용하면 어떨까? 대부분의 현안에서 여당은 여당이니까, 대통령은 대통령이니까 피자를 자르고 또 취하는 일 모두에서 우선권을 쥐려고 하면서 불만이 생기고 불통이 일어났었다. 서로를 인정하고 한 번에 하나씩만을 취하는 양보를 실천하면 공평과 공정이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한 정당 안에서 일어난 계파간의 갈등도 알고 보면 이와 대동소이하다. 예컨대 국회의원 후보자의 선발권도 기준을 정하는 쪽과 반대쪽이 그것을 적용하는 우선권을 균분했더라면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저질의 정치촌극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작지만 서로를 신뢰하는 정치 문화를 만들어가는 합리성이다. 알고 보면 합리성은 정치에서 암묵적 계약관계를 일컫는 다른 말이다.

덧붙여 정체를 만난 교차로에서 저쪽 차를 한 대 보낸 이쪽이 가는 양보운전은 자연스럽게 교통정체를 해소시키는 합리적 문화이다. 이런 합리적 문화를 만들어가는 성숙한 정치인들을 20대 국회와 청와대에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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