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화자'로 사는 낯익은 자아상이 되어 버린 우리의 모습이 참 부끄러워

소설의 화자는 '믿을 수 있는 화자'와 '믿을 수 없는 화자'로 나뉩니다. 시선이 닿는 곳만 묘사하는 외부 관찰자 시점이든 조감(鳥瞰·높은 곳에서 내려다 봄) 시점의 전지적 입장이든 화자는 결국 그 둘 중의 하나로 귀결됩니다. 작품을 읽다 보면 독자는 어느 순간 이 둘 중의 하나를 만납니다. 시작 부분에서부터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만나면 풍자나 패러디를 예감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그를 만나면 기분 좋은, 혹은 놀랄만한 반전을 경험합니다.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전하든 '낯설게 하기'를 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손님이 들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가라면 누구나 '믿을 수 없는 화자'와 함께 하는 것을 즐기는 편입니다.

'믿을 수 없는 화자'는 여러 가지 수준을 보여줍니다. 가장 평이한 것은 독자보다 훨씬 낮은 의식 수준을 가진 화자가 캐스팅되는 것입니다. 어눌한 말투를 통해 역설적, 우회적으로 작가의 내심(內心)이 전달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 '믿을 수 없는 화자'인데 그가 전하는 내용은 영락없는 알짜배기들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전하는 말인데 그게 핵심을 건드립니다. 그래서 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본의 아니게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 찌들지 않은 어린 화자가 적격입니다. '사랑손님과 어머니'(주요한)나 '기억 속의 들꽃'(윤흥길)과 같은 작품이 그런 예가 됩니다. 어른의 시점에서 말하기에는 너무 싱겁거나 너무 부담스러운 내용을 그렇게 세상 모르는 어린 화자를 기용해서 전달합니다. 그게 훨씬 실감날 때가 많습니다.

주인공의 심적 변화나 각성(覺醒)이 감동의 원인이 되어야 하는 '수준 있는' 이야기에서는 '믿을 수 없는 화자'의 역할이 좀 더 심오해집니다. 이야기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 그동안 자신이 '믿을 수 없는 화자'였다는 것을 스스로 밝혀야 합니다. 그것을 설득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기계 장치로 내려오는 신(데우스 엑스 마키나)'에게 맡기면 어쩔 수 없이 졸작이 되고 맙니다. 인간의 일을 신을 불러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 유혹을 피해야 진정한 작가입니다. '금시조'(이문열) 같은 작품이 그 대표적인 것이 되겠습니다.

살다 보면 작품 밖에서도 '믿을 수 없는 화자'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나랏일을 한다는 정치판에서도 만나고, 좋은 물건만 싸게 판다는 홈쇼핑에서도 만나고, 하루의 일과를 서로 공유하는 동료 사이에서도 만납니다. 그렇게 인생사에서 만나는 '믿을 수 없는 화자'들은 소설의 화자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높은 차원에서의 소통'을 의도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을 믿어달라고 떼를 씁니다.

오해를 살 수도 있는 가설입니다만, 저희와 같은 전후 세대(베이비부머)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화자'가 참 낯익은 자아상(自我像)입니다. 돌이켜 보면 저희들이 성장하던 시기에는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있는 화자'를 자신하지 못했습니다. 아침마다 학습 준비물 살 돈을 얻지 못해 울면서 학교에 가던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부모들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렇게 자라서 여전히 '믿을 수 없는 화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참 부끄럽습니다. 지금까지의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운명을 멋지게 한 번 벗어던지고 싶습니다만, 그게 워낙 큰 반전이라,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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