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직관적인 지혜를 배워서 삶의 통찰력을 회복하자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요즈음 주위를 둘러보면 한 세대 전에 비해 어린이 풍속이 많이 퇴색한 느낌을 받는다. 어린이 용품들은 풍성해졌지만 정작 어린이를 존중하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펼치는 활동들은 많이 줄었다. 그 중 하나는 동요 부르기가 사라진 점이다. 아름답고 쉬운 우리말 동요는 맑고 깨끗한 심성을 자아내는 시어로서 어른들조차도 맑게 만든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보고 자라니까요' 이런 동요를 모르는 아이들의 일상은 각박해지고 그래서 그들의 인격은 점점 더 메말라가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와 물었다(마태복음 18장).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앞에 불러 앉히며 대답하셨다. "진실을 너희에게 말해주마.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아이의 낮은 지위를 취하는 사람이 천국에서 최고위급 인사가 된다. 따라서 이런 아이를 내 이름으로 환영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간에 나를 환영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정말로 순수하다. 짐작이나 억측이 없다. 누구와도 놀고 언제나 헤어진다. 빈부나 귀천은 부모들의 몫일 뿐 자신들은 그저 있는 대로 받아들인다. 때때로 이것은 화려한 꾸밈을 일삼는 어른들과는 달리 진리를 직관하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하루는 공자 선생께서 제자와 길을 가는데 두 어린이가 와서 질문을 했다. "할아버지, 우리 둘이 해를 보면서 다르게 생각하는데 누가 옳은지 판단해 주십시오" 한 아이가 말했다. "저는 아침 해가 점심 해보다 우리와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쟤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제 말이 맞죠?" 이런 질문을 처음 받은 선생은 궁리 끝에 되물으셨다. "왜 그렇지?" "어떤 물건이 가까이 있을 때 더 커보이게 마련입니다. 아침 해가 점심 해보다 더 크기 때문이지요"라고 첫째 아이가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선생에게 또 둘째가 질문을 했다. "불은 가까이 있을 때 더 뜨겁습니다. 점심 해가 아침 해보다 훨씬 더 뜨겁습니다. 그래서 점심 해가 더 가까이 있습니다. 제 얘기가 맞죠?" 난감한 입장이 된 공자 선생은 마침내 회피하는 대답을 하셨다. "얘들아 쓸데없이 먼데 있는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눈에서 가까운 것이나 신경 써라" 그러자 아이들은 다른 질문을 퍼부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눈에 제일 가까운 눈썹은 몇 개죠?" "그리고요, 눈동자는 어느 것이 더 크죠?" 그러자 선생께서는 중얼거리시면서 황급히 자리를 뜨셨다. "나, 바빠서 간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아이들의 단순한 궁금함은 큰 우주론이나 과학철학의 문제로 이어진다. 아이들의 질문을 무지나 유치함의 소치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 자신들이 그럴 지도 모른다. 어린이들은 과연 유치한 존재인가. 영국의 위대한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내 가슴은 솟구쳐 오른다'라는 시에서 놀랍게도 '어린아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다'라고 묘사했다. 그는 어린아이를 어른들이 닫혀 보지 못하는 사실과 진리 그리고 초월의 세계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지혜를 가진 존재로 본 것이다.

오늘 어린이날에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들과 같이 되어, 삶의 통찰력을 회복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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