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동해안 1천리를 가다] 건설·남빈동 매립 '해양도시 포항' 형성 결정적

▲ 송도 및 동빈항 항공촬영. 조준호기자 cjh@kyongbuk.com

지난 100여년간 포항은 철저한 관 주도형 계획도시로 성장을 거듭했다. 섬과 뭍을 매립하고 항만건설 등으로 해안가 중심으로 도심을 형성시킨 대표적 해양도시다. 국내 타 도시와 다르게 도심 속 바닷길인 운하도 갖고 있다.

포항은 조선시대 해양을 천시 여긴 탓에 이전 고려시대 보다 도태됐다가 1900년대 초부터 포항으로 이주한 일본인에 의해 발전이 빨라졌다.

일제시대 영일만은 물 반 고기 반 그 자체였다. 한 예로 영일만의 청어는 조선시대부터 유명했으며 일제강점기때 한국 청어의 7할을 포항의 청어가 차지했을 정도였다.

1934년에는 동해에서 1년에 5만t이나 잡혔다. 포항지역에서 어림잡아도 3만5천t의 어획고를 올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호미곶 구만리에 까꾸리개(鉤浦)라는 이름의 해안가가 있다. 파도에 밀려온 청어떼를 까꾸리(표준말, 갈고리)로 마구 끌어올렸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러한 지명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이런 포항이 가진 가치를 알고 해양계획도시로 판을 짠다. 효과적인 수탈을 위한 물류의 중심지 역할과 영일만을 끼고 있는 동해의 가치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당시로도 천문학적인 자금과 시간을 투입해 계획도시로 발전시켰다.

이런 이유로 포항은 일제시대 경북의 타 도시를 제치고 '지정면'으로 지정됐다. 지정면 지정은 식민도시로 포항이 발전할 수 있는 도화선이 됐고, 1912년에 대구-포항간의 국도 2등도로 완성과 북쪽으로는 포항-영덕간을 연결하는 국도(7호선)가 개통됐다.

또, 1916년 동해중부선 건설을 계기로 배후지역인 경북내지의 상품작물을 집산해 수송키 위한 항구로서 급속하게 성장한 대표적인 어항도시로 면모를 갖춰갔다.

어항 건설 및 형산강 개발은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돼 20년 넘게 진행됐다. 1913년 10월 7일 형산강방사제축조공사를 시작으로 1919년 1월 7일에 착공한 형산강 북하구도수제축조공사 등 해양 계획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꾸준히 진행됐다.

그러다가 1924년 4월 12일에 닥친 초유의 악천후 기상이 동해안 일대를 강타했을 때 포항지역은 수백척의 어선과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항만 축조의 필요성이 제기돼 대단위 공사가 시행됐다.

동해중부선 건설이 식민도시 형성의 기초가 됐다면 포항항의 건설과 남빈동 매립은 해양도시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시설물 건설은 또다른 일본인 이주로 이어졌고 이들이 포항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수산물유통의 중심지와 해양 도시로 포항을 형성시켰다.

1910년 초기 포항인구는 3천501명으로 이중 일본인은 401명, 1942년은 3만5천251명 중 일본인은 2천775명이 거주해 급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인구 증가는 시가지 및 도심 확장을 불러왔다. 당시까지만 해도 형산강 북하구부터 남빈 일대는 황무지였다. 1931년 남빈동 매립공사를 시발로 해서 죽도동의 현재 오거리 방향과 또 동북으로는 하구부근의 학산동과 용담동 등 지금의 항구동에 매립이 진행돼 시가지의 평면적인 확대가 이어졌다.

또, 1930년 공유수면 매립을 통해 강안도로 구축 및 시가지 조성이 주목적으로 꾸준히 바다 및 형산강의 매립이 진행됐다.

포항시민들이 우스갯소리로 포항 바닥을 조금만 파면 바닷물이 나온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하다.

▲ 동빈내항을 항해하는 황포돛배.


당시 포항의 도심 길은 마름모 형태로 계획됐으며 일본식 도로명이 사용됐다. 중심시가지에서 남북간선도로를 중심으로 서쪽에서부터 본정, 욱정, 동빈정 등으로 동쪽에는 남빈정, 초음정, 중정, 대정, 명치정, 영정, 소화정으로 불렸다.

포항항과 동빈동을 비롯해 매립 등을 진행, 계획적으로 만든 해양도시는 1950년 발발한 남·북전쟁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파괴됐다.

두 번이나 북의 손에 넘어간 포항은 도시 전체가 대규모 폭탄투하로 한순간 폐허가 됐다. 하지만 포항이 가진 영일만의 입지조건 등으로 다시 회생한다.

1950년 대규모 연합군 소속의 다국적군이 영일만에서 화포공격을 실시하며 송도해수욕장과 북부해수욕장을 교두보로 삼아 포항을 확보하고 북진을 거듭했다.

이때 두 번이나 북의 손에 넘어간 포항을 탈환키 위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듯 송도해수역장 앞 코모도 호텔 맞은편에는 포항지구전적비와 미군위령비가 솔밭 아래에 조성돼 있다.

이 비는 당시 미군 통역관으로 근무한 이종만씨가 미군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기 위해 1952년 포항역 광장에 설치했다가 1969년 4월 22일 이 자리로 옮겼다. 이때 포항항은 군사항으로 지정됐다.

추모비가 있는 송도는 이전 소금을 생산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송도라는 지명은 일제시대 후반부터 사용된듯하다. 포항운하관에 전시된 포항진지도(1872)를 보면 형산강 하구에 한자로 '해도, 하도, 상도, 죽도, 분도' 등 다섯 개의 동이 한 개의 큰 섬 내 표기돼 있다.

이 때도 송도라는 지명이 없었고 1938년 9월 27일 포항읍이 한차례 그 구역을 확대 정리하면서 포항읍은 형산면 13개동(득량·죽도·학잠·대도·상도·해도·용흥·장성·양덕·환호·여남·창포·우현)과 대송면의 송정동 일부를 흡수 통합하고, 대송면 행정구역에서 행정상 불편을 느껴오던 향도(向島)를 향도동(광복 후 송도동)으로 신설됐다. 당시 송도가 아닌 향도로 표기됐다. 하지만 일본인 사이에서 송도라 불린 자료가 있는 것으로 봐 송도는 일본인이 만든 지명인 것으로 추측된다.

포항의 옛 지명 중 유독 타 도시와 다른 것이 도(島)자가 사용된 동이 많은 점이다. 송도동을 비롯해 죽도동, 해도동, 대도동, 상도동 등이 있다.

▲ 송도 코모도 호텔 맞은편에 조성된 전적비.


포항시의 자료에는 5개의 섬이 존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포항진지도 상에는 형산강 하구에 큰 삼각주 형태의 1개의 섬이 있었다.

5개의 섬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1개의 큰 섬에 5개의 부락(동)으로 존재한 듯하다. 그 사이를 이어주는 섶다리가 있었고 일제시대부터 꾸준히 실시한 매립 등으로 사라졌다.

송도에서 생산된 소금은 상당히 질이 좋았다. 영일만권 네 고을 가운데 유일하게 영일현의 사염(沙鹽)이 토산물로 각광을 받았다.

19세기 포항지역의 제염지로서는 송도와 해도지역이 꼽힌다. 해도와 송도의 염전토질이 어느 지역보다 염분량이 높아 소금의 품질이 좋을 뿐아니라 윤택이 나고 빛이 곱다하여 금산동(金山洞)이라 부르기도 했다.

송도의 북쪽지역은 염둥굴(염등골)이라 불러 일찍부터 소금 굽는 마을로 유명했으며 염등곡(鹽登谷·소금이 올라오는 골이라는 뜻)이라는 지명을 통해 그러한 사실의 추정이 가능하다.

현재 국산 소금으로 잘 알려진 천일염은 일제시대 비싼 소금을 효과적으로 생산키 위해 일본에 의해서 도입된 방식이다.

값싼 천일염에 밀려 송도의 소금시설은 1950년대까지 유지하다가 사라졌다.

송도는 깨끗한 바닷물로 양질의 소금을 생산했지만 그 깨끗한 바다때문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송도해수욕장으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포스코 건설 등으로 환경이 나빠져 자연스럽게 상권은 영일대 해수욕장(구 북부해수욕장)으로 옮겨진다.

남북전쟁에 폐허가 된 포항은 해안가를 주변으로 다시 주민들이 모여 수산업 등에 종사했다. 당시 해안의 밭에서는 시금치, 시나나빠(월동초), 양파 등 재배가 시작됐다. 포항의 특산물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광복이후 동빈내항으로 불린 포항항은 잠시 쇠퇴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6·25 전쟁 발발 후 군사항으로 사용됐다. 1962년 6월 국제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 국제적인 해양도시로 성장할 발판이 마련됐다.

또, 1967년 포항제철소(포스코) 건설이 시작돼 포항은 해양공업도시로 발돋움 한다. 이때 대단위 토목사업과 해양으로 매립, 항만이 건설됐다. 건설 붐으로 자연스럽게 항만시설 주변으로 양회 등 건설관련 시설이 포진되고 포항제철로 인해 지곡동 일대가 자연스럽게 확장 개발됐다.

급성장한 포항은 물류의 중심지로 또, 해양도시로 거듭 발전키 위해 신항만 등이 건설됐다. 오는 2020년까지 동빈항 송도에 있는 일부 시설 등이 신항만으로 옮겨진다.

▲ 포항진지도 1872년. 포항 형산강 하구에 큰 1개의 섬에 5부락이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다.


2013년 11월 2일 동빈항 통수를 시작으로 송도는 40년만에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포항은 다시 한번 해양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변화가 시작됐다. 도심 속에 흐르는 바닷길을 가진 해양도시다.

이처럼 포항은 지난 100여년간 수차례 계획적인 개발로 성장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영일만의 지정학적 위치, 수산물 등의 장점과 이를 효과적으로 수탈하려는 일본에 의해 형산강과 항만건설, 매립 등으로 발전이 촉진됐다. 1960대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포항제철 건설을 위해 개발됐다. 2000년대는 들어서서 신항만 건설과 해양 환경 도시건설로 면모를 갖춰가고 있는 중이다.

포항이 가진 해양의 장점은 무궁무진하다. 이런 장점을 부각시켜 세계적인 해양도시로 변모하길 기대한다.


2016050515_180송도해수욕장_1976년7월31일,개장.jpg
▲ 1976년 7월 31일 송도해수욕장이 개장이래 최고 인파를 기록했다. 약 12만명 추산.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