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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은의 풍수이야기 (24)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

이인손의 옛 묘택 자리로 '천선강탄형' 천하의 대명당

등록일 2016년05월09일 21시26분  

▲ 조선 4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나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것이 있다. 가족이 건강하게 사는 것과 자녀가 훌륭하게 성장하는 것, 그리고 재정적으로 부유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같은 공통분모일 것이다. 땅은 모든 만물의 모태이며 출생과 성장 그리고 소멸에 이르기까지 그곳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환경이 좋은 곳인가, 그렇지 못한 곳인가를 가름하는 것은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 터이기 때문에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생자의 생활환경이나 망자의 유택환경이나 다 같이 좋은 터를 잡아야하는 것은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이다.

500년 조선의 역사 중에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세종대왕릉은 어떤 자리인가를 살펴보자. 당시에 천문과 지리를 살피는 것은 중요한 시대적 소명이었을 것이다. 세종시대의 문물의 발전을 가져왔던 업적을 보면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업적이다. 이러한 성군은 사후에 어떤 유택에 잠들었을까 궁금하다. 필자는 지난 겨울에 전국의 명당을 답사하기로 하고 일정을 잡아 전라도 광양의 옥룡사지를 비롯하여 구례의 운조루, 사성암, 충청도 가야산 아래 있는 남연군 묘를 비롯한 토정 이지함선생 묘를 둘러보고 밤늦은 시간에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장에서 비박을 하고 아침 일찍 왕릉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입구 좌측에 전시되어 있는 천문에 관한 여러 발명품을 보고 감개가 무량하였다.

이곳에 왕릉을 조성할 수 있기까지 많은 곡절이 있다. 지금의 세종대왕릉 자리는 지관 안효례(安孝禮)가 북성산 정상에서 보아 두었던 그 터였는데 산을 내려와서는 찾을 수 없었던 대 길지였던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야트막한 산언덕에 있는 묘택으로 눈이 돌아가니 천선강탄형(天仙降誕形) 천하의 대명당이 바로 그곳이 아니던가.

이인손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일러주는 내용을 유언으로 쓰는 조건으로 묘택의 세부 사항을 알려주었다. 첫째는 묘택 앞을 흐르는 개울에 절대로 다리를 놓지 말 것이며, 둘째는 재실이나 사당 등 일체의 건물을 짓지 말라는 것이었다. 광주 이씨 문중은 이인손의 유언을 그대로 지켰다. 그러자 이인손의 친자 5형제와 종형제 3인을 합해 '팔극조정(八極朝廷)'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승, 판서가 가문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후손이 볼 때 이인손의 묘택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양반 체면에 다리도 없는 냇물을 신발 벗고 건너야 하는 것은 물론, 멀리서 온 자손이 잠잘 곳도 없이 모이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등 제사를 지낼 때마다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자 문중 회의에서 유언에 반해 재실을 짓기로 결정했다. 이 재실 덕분에 안효례가 이곳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예종의 명으로 여주와 이천 쪽으로 세종의 천장 자리를 보러 나온 지관 안효례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비를 피할 곳을 찾는데 산자락 아래 조그마한 건물이 보였다. 광주 이씨 문중에서 전해에 세운 재실이었다. 그는 그곳을 향해 달렸는데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 때문에 냇물이 불어 섣불리 건널 수 없었던 것이다. 낙담해 두리번거리던 그는 아래쪽에서 돌다리를 발견하고 냇물을 건너 재실에서 소낙비를 피했다. 소낙비가 그치자 주위를 돌아본 안효례는 깜짝 놀랐다. 그곳이 바로 자신이 찾아다니던 천하의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소낙비를 피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묘택의 묘비를 보니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것이었다. 정승을 지낸 분의 묘택으로서 훌륭한 대명당(大明堂)임에는 분명하였으나 그 자리는 군왕(君王)이 들어설 자리이지 정승(政丞)이 들어 갈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연신 탄성을 내지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런 명당 터는 조선에 다시 없다. 성스러운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묘택(墓宅)으로서는 여기가 최적지다. 그러나 이미 이인손(李仁孫)이 묘를 썻으니 어찌할꼬!' 산도(山圖)를 열심히 그려 궁궐로 돌아와 예종(睿宗)께 복명하기에 이르렀다. 왕은 지관들을 불러다 놓고 묻는다. "경 등이 답사한 결과 명당이라 할 만한 곳이 과연 있었던고?" 안효례가 답한다. "예, 두루 살펴본 결과 몇 군데 능산(陵山) 자리가 될 만한 터는 있었으나 천하 대명당 자리로 손꼽을 만한 곳은 딱 한자리가 있사옵니다. 여흥(驪興) 북쪽에 큰 골짜기가 하나 있는데 산의 형세가 떡 벌어져서 주산(主山)과 무덤자리가 분명한 곳으로, 풍수법(風水法)에 이르기를 산이 멈추고 물이 구부러진 곳은 자손이 크게 번성하고 천만세 동안 승업(承業)을 이어간다고 하였는데, 즉 이곳이 그곳으로 사려 되오며, 신이 본 바로는 능을 모실 터가 이보다 나을 곳이 없을 듯합니다. (驪興之北. 有一大洞. 岡巒列勢. 主對燦然. 法曰山頓水曲子孫千億. 此臣等所相. 陵寢所安, 無右於此)."

▲ 세종대왕릉에서 바라본 정자각 모습과 전경.

예종은 그 후로 여러 날을 고심한 끝에 묘책을 생각해내고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큰아들 이극배(李克培 = 領議政. 廣陵府院君)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아무리 지존무상의 대왕이지만 사대부의 묘택을 함부로 어찌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종은 인간적인 호소를 하였다. 말하자면 그 명당 터를 양도해달라는 은근한 압력을 우회적으로 구사하였던 것이다. 원래 왕은 용상(龍床)에 앉아서 말하는 것이 상례이거늘, 그 옆에 돗자리를 깔아 이극배를 앉게 하고 왕도 용상에서 내려와서 친히 그 옆으로 바싹 다가앉아 극배공(克培公)의 손목을 잡으며,  "경은 얼마나 복이 많아서 선친의 산소를 그렇게 좋은 대명당에 모시었소? 짐은 삼천리 강산을 갖고 있으되 조부 세종대왕을 편히 쉬게 할 곳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으니, 나라에 극심한 한발과 폭풍우로 곤란을 겪는 일이 발생하고 있으니 그저 경들이 한량없이 부럽기만 할 따름이오." 하면서 수차에 걸쳐 애원하다시피 이를 되풀이하니 바로 명당 터를 양보해달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하는 수없이 극배공은 묘터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인손의 묘를 파서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비기(秘記)를 새겨 넣은 글귀가 나왔는데,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이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연(鳶)을 날리어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 묘를 옮겨 모셔라.' 장례를 할 때 벌써 이장의 운명을 알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그렇게 하니 과연 연은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약 10리쯤 밖에 떨어졌다. 그곳에 가보니 대명당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아늑한 터로써 자손이 번창할 만한 곳이었다. 이리하여 이인손의 묘는 현재의 영릉자리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으로 옮겨졌으니, 그곳을 이름 하여 연이 떨어졌다 해서 연주리(延主里: 지금의 新池里)로 불렀다. 그 자리에 이장을 한 후에도 대명당(大明堂)은 못되더라도 아늑한 자리로서 자손이 번창하여 수백년이 지난 오늘까지 후손들의 제향(祭享)을 받는다. 또한 일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이인손의 묘를 파내려갈 때 신라 말의 풍수사인 도선(道詵)의 비기가 나왔다는데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상공삼년 권조지지. 단족대왕 영핍지지 = 相公三年 權操之地. 短足大王 永乏之地' 즉, 이곳은 나라의 재상이 3년 동안 임시로 묻혀 있을 곳이지만, 단족대왕은 영구히 쉴 자리라는 뜻이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단족대왕은 세종대왕을 가리키는 말인데, 원래 세종대왕은 한쪽다리가 짧아 절룩거렸기에 단족대왕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리의 이치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이토록 정확하게 조화하는 것은 모두 까마득한 미래의 운명까지도 좌우한다. 명당 터의 참주인은 누가 될 것이며, 이장은 언제 어느 곳으로 하게 되고 그날의 날씨는 어떠하다는 등등 천지인의 모든 것을 관장한다. 이른바 '탈신공(奪神公) 개천명(改天命)'이니, 지리(地理)에는 하늘의 명까지도 바꿀 수 있는 무서운 힘이 있는 것이다. 그날에 소나기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재실로 비를 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요, 다리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건너지 못했을 것이며, 그랬더라면 자손 천억 천선강탄형의 대명당도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니 지리의 이치란 그저 오묘하기만 하다. 이 능(陵) 자리로 인하여 조선왕조(朝鮮王朝)가 100년을 더 이어질 수 있었다는 지리학적 설화(說話)가 지금도 전해져 오고 있다.

▲ 왕릉 용세도


세종대왕릉 좌우 경사면을 비롯한 후면의 소나무를 살펴보면 정사를 보는 대전에서 신하가 왕에게 공손히 예를 하는 모습과 같이 소나무가 좌우에서 능 쪽으로 기우러져 자라고 있으며 이는 성군에 대한 예를 갖추고 있는 듯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풍수지리적 입지는 남쪽에 있는 북성산(해발 250m)에서 북으로 낮게 용맥은 이어지고 42번 국도를 지나면서 서서히 기룡하여 서북으로 지맥을 내어주고 본룡은 동으로 방향을 틀어 넓고 풍만하게 용체를 만들면서 용맥이 출발한 북성산 즉, 조산(祖山)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형세를 하고 있다. 북으로는 남한강이 등지고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으며 왕릉의 내수는 남으로 흘러 다시 동으로 물길을 잡아 최종적으로는 북으로 흘러 남한강에 합류하고 있어서 완전히 환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은 산의 흐름과 물길이 산수태극으로 음양이 상배하여 좋은 기운을 갈무리하는 곳이서 풍수지리적으로 천하명당이라 할 수 있으며 조선왕조 중 성군인 세종대왕께서 이곳에 잠들 수 있는 것은 풍수이론으로 효심과 적덕과 적선을 많이 한데서 이르는 성어로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란 말이 있듯이 명당의 주인은 하늘이 내어주는 것으로 더없이 좋은 대명당이다.


▲ 양동주 대구한의대 대학원 겸임교수
양동주 교수 프로필

△포항 신광 출신

△대구한의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

△좋은터생활연구원 원장

△(사)精通風水地理硏究學會학술이사

△대구교육대교,포항대교,영진전문대

평생교육원 풍수지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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