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역자 작업복으로 만든 청바지 할리우드서 패션 아이콘 선도 실용적이고 젊음·자유를 상징

의복엔 나름의 사연이 담겼다. 서늘한 소슬바람의 외투인 트렌치코트는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전쟁사가 어렸고, 남태평양 아름다운 산호섬의 하나인 비키니에는 핵 실험의 가공할 잔해가 숨었다. 또한 세계인이 흔하게 걸치는 블루진은 미국 서부 개척기의 일확천금을 꿈꾸는 애환이 스몄다.

원래 청바지는 작업복으로 만들었다. 영어로는 진(jeans)이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의 도시 제노바에서 유래한 명칭. 19세기 당시 미국은 골드러시로 수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 들었다. 와중에 황금을 캐는 사람보다 생필품을 팔던 이들이 떼돈을 벌었다. 수요가 넘쳐서 폭리를 취했기 때문이다.

최초로 청바지를 제조한 '리바이 스트라우스'도 이런 틈새시장의 부자였다. 그가 만든 질기고 간편한 바지인 리바이스는 노동자의 인기를 모았다. 특히 1920년 탄생한 '리바이스 501'은 지금도 마니아가 상당하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검은 터틀넥과 바로 그 청바지를 입고서 회견했다.

게다가 할리우드 배우들이 블루진 복장으로 은막에 등장하면서 유행을 선도했다. 단 세 편의 영화에 출연한 제임스 딘에 의해 그 옷의 운명은 탈바꿈한다. 처절한 노역자의 일복에서 저항과 자유의 상징을 품은 패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지난달 미국 여행 중 뉴욕의 우드버리 아울렛에 들러서 청바지를 샀다. 빈티지 풍의 캘빈 클라인 브랜드. 세금 4% 포함 51달러 줬으니 국내보다 상당히 저렴하다. 거의 반값 수준. 나의 체격을 가늠하던 흑인 점원의 권유대로 탈의실에서 입어 보니 맞춤복처럼 맘에 들었다.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열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본토의 진짜 블루진을 가졌다는 흥분감에 차오른 희열. 귀국하여 깨알 같은 라벨을 확인해 보니 'Made in Mauritius' 제품 아닌가. 아프리카 동쪽 인도양의 이름도 생소한 섬나라 모리셔스. 순간 중국산을 대하는 선입견이 들다가 생각을 바꿨다. 나이키 같은 유명 상표도 해외에 생산 공장을 둔 사실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어느 자료를 보니 청바지의 제작 과정은 이렇다. 카자흐스탄에서 재배된 목화는 터키의 방적 공장으로 운송돼 실로 만들어진다. 이 원사는 타이완으로 옮겨져 독일산 염료를 사용하여 파랗게 염색되고, 다시 폴란드로 가져가 원단으로 짜인 다음 동남아시아의 필리핀으로 보낸다.

여기서 저임 노동자의 재봉질로 청바지가 된다. 이탈리아산 금속 단추를 꿰맨 완제품은 부산항에 도착하고, 화물차가 백화점과 의류 매장으로 배송하여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다. 과장된 면도 있겠지만 청바지 하나엔 지구촌의 정성이 묻었다.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번화가인 넵스키 대로를 거니노라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청바지 차림의 청춘 남녀가 지나친다. 한때는 자본주의의 표징이란 이유로 금기시된 옷이기에 그러하다. 개인적으로 블루진 예찬자다. 이보다 실용적일 수 있을까. 엉덩이를 조이는 착용감에 살아 있다는 존재감이 인식되고, 어쭙잖은 흉내이나 왠지 젊음의 감각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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