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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16.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 생가 임청각

學行으로 3대 이은 호국투쟁…500년간 명문가 맥 이어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등록일 2016년05월15일 21시41분  
▲ 안동 임청각(보물 182호) 군자정.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생가 임청각.

임청각으로 대표되는 고성 이씨 석주 가문은 3대째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항일명문가'로 꼽힌다. 한 대만 독립운동을 해도 3대가 고생을 한다는데, 이 집안은 3대가 줄줄이 독립운동을 했으니 그 고생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석주 선생은 한말 퇴계학통의 유학자로 고성 이씨 17대 종손이다. 안동시 법흥리 안동댐 진입로 변에 위치한 임청각(보물 182호)의 소유주였다.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자 99칸의 집과 전답을 모두 팔고 1911년 1월 5일, 52세에 전 가족을 데리고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압록강을 건너기 전 "내 아내와 자식들을 왜놈 종이 되게 할 수 없다"는 시 한구절로 비분한 심경을 토로했다. 대개 종손은 가문을 지키느라 벼슬도 삼갔지만 석주 선생은 오히려 국권회복을 위해 고난의 길을 자처했다.

서간도로 망명한 후 그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를 이회영과 함께 건립해 신교육에 앞장섰으며, 경학사를 만들고 한족회회장,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을 역임했다.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채 1932년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 아들인 이준형 마저 1942년 자결로 일제에 항거했다.

석주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 만인 1990년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되어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가 1996년 임정묘역으로 옮겨졌다.

석주 가문이 500여 년이 넘게 명문가로서의 명맥을 이어온 바탕에는 '학행(學行)을 중시하는 가풍' 이 자라잡고 있기 때문이다.

▲ 국무령 이상룡 생가.

석주 이상룡과 그 자손들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게을리 하지 않은 오직 한가지가 바로 학문과 교육이었다. 석주의 아들 이준형은 간도에서 독립운동의 와중에서도 출산후 몸조리를 하고 있는 며느리에게 논어를 직접 가르쳤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준형은 일제에 항거해 자결하면서 아들 이병화에게 "종손의 학업은 비록 전답을 줄이고 재물을 쏟아 부을지라도 중도에 중단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일제는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라는 이유로 종손이 중학교에 다니는 것 조차 막았다. 이병화의 장남 이도증은 안동에서 공부를 하지 못해 결국 만주로 가 하얼빈에서 중학교를 마쳤다.

석주 후손들은 해방 후에도 큰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바치는 바람에 후손들은 가난한 탓에 학교에 다니기 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병화와 허은 여사 사이에는 6남1녀의 자식이 있었다. 위로는 아들 4명이 있었지만 생활고와 울분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야만 했다. 아들 이항증과 여동생은 한때 고아원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항증은 수업료를 내지 못해 중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했다.

▲ 임청각의 후손들은 세 명의 재상이 배출된다는 이 산실을 '우물방'이라 부른다.

군 제대 후에는 자신이 있던 고아원에서 총무 생활도 하고, 여기저기 실직자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간신히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해 친척 소개로 1972년부터 은행에 다닐 수 있었고, 은행원 봉급으로 형님들이 남긴 조카 9명을 거두어야만 했다. 1993년 은행을 퇴직하고 나서는 임청각을 복구하고 관리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지금은 광복회 경북지부장을 맡고 있다.

동생인 범증은 형님의 도움으로 9년 만에 고려대 사학과를 마칠 수 있었다. 집안의 유일한 대학 졸업자였다.

17대, 500여 년 동안 석주 가문에는 재물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가풍이 이어지고 있다. 선조들의 숨결이 묻어 있는 유품과 서적 문집 등이 유난히 많다. 후손들은 이를 고려대 중앙도서관 '석주문고'에기증했다. 임청각의 서적들은 모두 395종 1천309책에 이른다. 기증 당시 대학교 측은 4천만 원을 보상하겠다고 했으나 직계후손 이범증 씨는 "조상의 정신적인 유산을 팔아먹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당시 이범증 씨는 단칸방에 살았었다.

자료를 무상 기탁받은 고려대학에서는 부득이 유고 형태로 남았던 석주 선생의 문집을 영인본으로 간행하고 석주문고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석주 이상룡 선생.

석주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은 아직까지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석주를 비롯한 종손들이 만주에 망명해 있는 동안 친척의 이름으로 명의 신탁 등기한 종가집이 80여 년이 지나 명의자의 내·외손으로 상속권이 넘어가 70여 명에 이른 것.

직계후손들은 10여 년에 걸친 법적 투쟁 끝에 2010년 가까스로 임청각의 소유권은 겨우 찾았지만 아직도 문중 이름의 등기와 건축물대장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현행 법률로는 새로운 건축물로 지워지지 않는 한 임청각을 등기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한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광복70주년을 맞아 안동 임청각과 관련, 1940년 중앙선 개통 당시 행랑채 등 일부가 강제 철거됐기에 2020년 까지 우회철도를 개설한 뒤 훼손된 전각 복원 계획을 밝혔지만 소유권 등기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사업 추진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항증 직손은 "임청각은 국가문화재이고 헌법전문이 인정한 망명정부의 국가원수의 생가이니 국가에서 앞장서 정리하는 게 옳다"고 하소연했다.

▲ 21대 종손 이창수씨(오른쪽)와 숙부 이항증씨


석주 가문의 21대 종손은 이철증의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인 이도증의 후사를 이어 임청각 종통을 계승한 이창수(51)씨다. 현재 서울에서 직장샐활을 하고 있다. 종손은 종가 이야기를 할머니인 허은 여사로부터 많이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2남3녀의 5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셨는데, 주 수입원은 삯바느질이었다고 한다. 등록금을 낼 때마다 고비가 있었는데,대학 4학년 때 처음으로 독립유공자녀로 등록금을 면제 받은 기억이 있다고 전했다. 조부인 이병화 씨가 1990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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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명 기자

    • 오종명 기자
  • 안동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