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서든 정치판에서든 대중의 사랑받는 인물들은 작가의 '등장인물' 설정 탓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인물에 대한 사랑'을 한 꺼풀 벗겨보면 재미있는 사실들이 드러납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작가는 '소년'을 사랑합니다. '소녀'를 죽이고 '소년'을 살려서 그를 통해 소년기 첫사랑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나 정작 작가가 사랑했던 인물은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화신으로 작가 자신과 독자들의 무의식에 깊은 울림을 주는 초점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녀'입니다. '소년'은 단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아바타였을 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최근의 역사 드라마들을 살펴보면 '육룡이 나르샤'의 주인공은 정도전(김명민), '대박'의 주인공은 이인좌(전광렬)입니다. 그들은 역사의 패자(敗者)로 낙인찍힌 인물들이지만 작가의 사랑을 받고 부활합니다. 현실을 외면한 원칙적 이상주의자나 복수심에 불타는 '능력 있는 악인'으로 묘사되지만 그들은 작가의 전폭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게 대중의 사랑을 받습니다. 물론 그 배경에는 독자들의 '강렬한 현실 변혁에 대한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 또한 상식이겠습니다.
작가의 사랑을 받는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가 하는 정치행위(선거)의 이면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지자체장 등을 뽑는 유권자들의 심사도 그에 방불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떤 작품에서는 '연민의 구성'이 적용되고, 또 어떤 작품에서는 '징벌의 구성'이 적용됩니다. 무능한 어떤 인물은 실수를 연발해도 끝내 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물은 작은 말 실수 하나를 가지고 큰 징벌을 받습니다. 또 어떤 이에게는 늘 '시험(試驗)의 구성'이 적용되는데 반해 어떤 이에게는 늘 '개선(改善)의 구성'이 허용됩니다. 신문·방송도 마찬가집니다. 주인공은 따로 있는데 언론은 또 늘 다른 사람을 주목합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선거로 주인공이 밝혀지면 마지못해 '여론조사는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된다'라고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정치판에서도 '사랑받는 인물'들은 늘 따로 있습니다. 내가 주인공인데 왜 사랑받지 못하느냐고 항변하는 것은 겸손한 '등장 인물'의 태도가 아닙니다. 책을 발로 걷어찰 정도의 입체적인 인물이 아닌 한 그런 항변은 '나 못 났소'라는 자백과 다름없습니다. '사랑받는 인물'을 정하는 것은 당연히 작가의 몫이니까요.